플레눼 비프웰링턴과 피시&칩스. 사진 조선일보 DB
플레눼 비프웰링턴과 피시&칩스. 사진 조선일보 DB

2005년 당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차 러시아에서 만났다. 휴식 시간, 시라크 대통령이 자리에 없는 영국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유럽 농업에 기여한 것이라곤 광우병밖에 없지요.” 두 정상이 껄껄 웃었다. 신이 난 시라크 대통령이 한 걸음 더 나갔다. “영국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요.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는 나라 사람을 어떻게 믿습니까.”

시라크의 농담은 옆에서 엿들은 프랑스 기자가 기사로 쓰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재미있는 건 기사가 나온 뒤 프랑스와 영국 정부의 반응이었다. 시라크 대통령 대변인은 “당시 분위기나 말의 맥락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언급했을 뿐, 발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영국 총리실 대변인은 “때로는 언급하지 않아야 더 좋은 일도 있는 법이다”라고 점잖게 논쟁을 피했다. 총리실 대변인도 진실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기사를 쓴 프랑스 기자는 “영국은 솔직하게 자신들의 문제를 인정하는 민족이라 존경스럽다”고 비아냥댔다.

이처럼 영국 음식은 자타공인 맛없기로 악명 높다. 그런 영국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서울 광화문에 들어섰다. 코리아나호텔 2층 ‘플레눼(Flaneur)’다. ‘도대체 왜 영국 음식점을 냈을까’라는 의심과 함께 식당을 찾았다. 놀랍게도 빈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손님이 많았다.

플레눼는 ‘사색하며 걷는 사람’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영국 음식점을 그것도 하필 프랑스어 상호로 낸 이유를 신승환 셰프에게 물었다. 그는 미쉐린 1스타를 받은 스페인 레스토랑 ‘떼레노(북촌)’와 숯불로 모든 걸 요리하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 음식점 ‘엘초코 데 떼레노(한남동)’를 운영하는 스타 셰프다. “영국 음식이 맛없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어요. 플레눼라는 상호는 광화문 주변에서 문득 들어와 한잔하고, 시내를 내다보며 풍광을 즐기시라는 의미를 담았고요.”

메뉴판은 단 한 장으로, 모든 음식을 담았다. 그만큼 영국 음식이 단조롭다는 방증이다. 로스트비프, 피시파이, 피시&칩스, 비프웰링턴, 뱅어&매시, 셰퍼드파이(shepherd’s pie), 브레드&버터푸딩 등 영국 대표 음식이 모두 있었다. 이탈리아 생햄 프로슈토와 부라타 치즈로 만든 샌드위치와 티라미수 케이크, 프랑스 니수아즈(NiÇoise) 샐러드 등 영국 사람이 어쩌면 영국 음식보다 더 즐겨 먹는 외국 음식도 보였다. 그래도 영국을 대표하는 피시&칩스와 비프웰링턴, 셰퍼드파이, 브레드&버터푸딩을 주문했다.


요리사 실력으로, 본토 버금가는 맛 제공

피시&칩스는 원래 유대인 음식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튀김옷 입혀 튀긴 생선을 즐겨 먹었다. 이들이 종교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벨기에 등지로 이주했는데, 겨울 강이 얼어붙어 생선 구하기가 힘들게 되자 대신 감자를 생선 크기로 잘라 튀긴 게 칩(chip), 그러니까 오늘날 ‘프렌치프라이’로 흔히 알려진 감자튀김의 시작이다. 이후 이들 유대인이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피시&칩스를 소개했고,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 피시&칩스는 어쩌면 영국 본토보다 더 맛있다. 튀김옷은 부드러우면서도 바삭하고, 안에 든 생선살은 촉촉했다. 특히 생선이 아주 훌륭했다. 신 셰프는 “영국에서는 대구를 주로 사용하지만, 이맘때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흰살생선이 광어·농어 정도라 오늘은 광어를 썼다”고 했다. 그런데 광어살이 이렇게 두툼하다고? “3~4㎏짜리 엄청나게 큰 광어를 써서 그래요.”

이어 비프웰링턴이 테이블에 도착했다. 영국 전통 음식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프랑스 음식 버금가게 고급스럽다. 두툼하게 썬 비프웰링턴 세 덩어리가 담긴 접시가 비좁아 보였다. 넷이서 먹기에도 충분할 듯하다. 웰링턴(Wellington) 장군이 좋아해 그의 이름이 붙여진 요리로 알려졌으나, 그와 연관됐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꺾으며 유명해졌을 때는 이미 이 요리가 영국에 널리 퍼져 있었고, 이와 비슷한 요리가 프랑스에 오래전부터 있었다.

비프웰링턴은 국내에서 맛보기 어려운 요리이기도 하다. 커다란 안심 덩어리를 밑간해 겉만 익혀준 다음 머스터드(양겨자), 다진 버섯·시금치 등을 바르고 파이지로 감싸 오븐에 구워내는 조리 과정이 번거롭고 까다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요리 특성상 커다란 안심 전체를 써서 만들었다가 1인분씩 잘라서 팔아야 하는데, 팔리지 않고 남을 경우 다음 식사까지 보관해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엄청나게 잘 팔려야만 준비해놓을 수가 있는데, 국내에서는 같은 고기 요리라도 스테이크에 비해 덜 알려져 있어서 위험 부담이 크다. 신 셰프는 “작게 만들면 제맛이 나지 않아서 모험을 했는데, 다행히 손님들이 좋아하신다”고 했다. 식당을 둘러보니 테이블마다 비프웰링턴 한 접시씩은 올라 있는 듯했다. 파이지를 감싸 구운 안심은 완벽한 미디엄 레어로 구워진 상태. 연하고 육즙이 빠지지 않았다.

다진 양고기를 각종 채소와 우스터소스, 레드와인, 허브와 함께 갈색이 나도록 볶아 그릇에 담고 매시트포테이토(으깬 감자)로 덮어 오븐에 구워낸 셰퍼드파이, 식빵에 버터를 발라 오븐 용기에 차곡차곡 담고 커스터드를 붓고 건포도를 얹어 구운 브래드&버터푸딩 등 맛본 음식들은 영국 본토 식당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나은 수준이다. 음식 맛은 어떤 나라 것이냐보다 어떤 요리사가 만드는지에 달린 듯하다.


Plus Point

플레눼(Flaneur)

분위기 짙은 갈색 목재로 마감한 식당은 런던의 고급 사교클럽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지만 통유리창 덕분인지 그보다는 훨씬 밝고 젊다.

서비스 정중하면서도 신속하고 매끄럽다.

추천 메뉴 피시&칩스 2만8000원, 비프웰링턴 8만원, 피시파이 3만5000원, 콜리플라워스테이크 1만5000원, 로스트비프 5만5000원

음료 피시&칩스에는 맥주가 제격. 국산부터 일본·아일랜드·스코틀랜드산까지 다양한 맥주 중에서 골라 마실 수 있다. 와인도 레드 25가지, 화이트 12가지, 샴페인 포함 스파클링 13가지가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호주·미국 등 국적별로 고루 있다. 위스키, 진 등 고도주도 20여 가지 갖췄다.

영업시간 점심 낮 12시~오후 3시, 저녁 오후 5~10시

예약 권장

주차 편리

휠체어 접근성 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