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서울 강남구 LH 서울지역본부 앞에서 열린 ‘LH 부동산 투기에 분노한 청년들 모여라 긴급 촛불집회’에서 한국청년연대와 청년진보당 등 참석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3월 15일 서울 강남구 LH 서울지역본부 앞에서 열린 ‘LH 부동산 투기에 분노한 청년들 모여라 긴급 촛불집회’에서 한국청년연대와 청년진보당 등 참석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공간 영역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은 본능에 가깝다. 사바나 초원의 사자도 마찬가지다. 사자는 똥이나 오줌 같은 자신의 분비물로 영역을 표시한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무를 할퀴기도 한다. 영역을 침해한 자들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반응은 ‘보복’이다. 영역 표시 행동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는 가차 없이 응징을 당할 것이라는 강력한 사전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요즘 학생들은 학교에서도 1인 1 책상을 사용한다. 하지만 1960년대생으로 80년대 학번인 나와 같은 ‘68세대’는 2인용 책상을 함께 사용했다. 초등학생 시절 짝꿍 중에는 유달리 영역 욕구가 강해서 책상의 중간에 연필로 경계선을 긋는 친구들이 꼭 있었다. 그들은 나의 팔 혹은 내 소유의 책이나 학용품이 경계선을 넘을라치면 버럭 화를 내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영역(?) 바깥으로 밀쳤다.

어릴 적 내 짝꿍만 그런 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쓴다. 지하철의 ‘쩍벌남’처럼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예민해진다. 어떤 자가 내 영역을 침범했다는 비상벨 소리가 감정을 담당하는 나의 대뇌변연계를 강력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길게 늘어선 줄 혹은 쇼핑카트 앞의 일정한 공간은 일시적으로 나만의 영역이 된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자신 혹은 자신의 카트 앞으로 새치기하려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막 창궐하기 시작하던 초기, 공적 마스크 대란의 시기에 마스크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던 사람은 아마도 살벌한 눈초리를 넘어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잘 달리는 어떤 차량 앞으로 방향지시등도 넣지 않고 무단으로 끼어드는 행위, 교통 체증으로 안 그래도 밀리는 출퇴근길에 ‘칼치기’로 차량을 들이미는 행위는 확실한 영역 침범 행동이다. 영역을 침범한 차량의 운전자는 각오해야 한다. 상대방이 큰 소리로 오래 경적을 울리거나, 상향등을 쏘아댈지도 모른다. 심지어 보복 운전을 당할지도 모른다.


상징적 기능의 ‘집’ 집착은 인간 본능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역은 땅과 집이다. 땅과 집은 단순히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하는 일차적 기능 이상의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과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동네, 자신이 사는 아파트 면적으로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연구에 의하면, 영역으로서의 집이 제대로 된 상징적 기능을 가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원경(遠景)이 좋아야 한다. 먼 경치가 잘 보이려면 당연히 집이 높아야 한다. 우리가 아파트의 고층을, 특히 펜트하우스를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단, 달동네 옥탑방은 안전과 생존의 보장이라는 일차적 기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상징적인 기능을 논하는 자리에 끼지 못한다.

두 번째는 물이 좋아야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깨끗한 물이 가까이에 있는 풍경을 가진 집을 사람들은 더 좋아한다. 창밖으로 강이나 바다가 보이는 집이 더 비싸다. 아파트에 ‘리버뷰’나 ‘오션뷰’라는 말이 많이 붙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집이 산속에 있다면 호수나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집을 더 좋아한다.

세 번째는 규모의 문제다. 즉 집은 규모가 클수록 비싸다. 경제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사람들은 너른 평수의 아파트나 규모가 큰 저택을 더 좋아한다. 사람들은 옛 봉건 왕조의 왕이 살던 궁전이나 영주가 살던 성채 같은 집을 좋아한다. 아파트 이름에 유독 팰리스나 캐슬 같은 이름이 많은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영역 본능이 극도로 낮은 사람들이거나, 자의든 타의든 영역 욕구를 포기하거나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영역으로서 집의 상징적 기능에 초연하다. 우리는 그들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적인 자유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영역으로서의 집이 가지는 상징적 기능에 매달리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누구도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영역 본능을 표출할 합법적인 기회와 선택의 자유를 불법과 편법을 동원하여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고 불공정을 부추기는 행위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고 불공정을 부추기는 행위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무임승차자’에 분노하는 사람들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들을 ‘무임승차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사회적인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이 취하는 협력적 동맹의 열매는 잘 챙긴다. 하지만 동맹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정당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고 사회의 불공정을 부추기는 사기꾼들이다.

미국 애틀랜타주에 있는 여키스 국립 영장류 연구소의 연구진이 침팬지를 두 마리씩 짝지어 똑같은 일을 시키고, 한 마리에게만 더 나은 보상을 주는 실험을 했다. 다른 침팬지가 달콤한 포도를 받는 데 비해 자신은 맛없는 오이를 보상으로 받자 그 침팬지는 더는 일을 하려고 들지 않았고 오이도 집어던져버렸다고 한다. 침팬지들조차 불공정한 처사에는 매우 민감하고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사회의 공동 목표를 위한 협력적 동맹에 가장 앞장서야 할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공사를 구별 못 하는 부정행위에 대해서 우리가 분노하는 것도 그들의 행위가 극도로 죄질이 나쁜 불공정 행위이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에 의하면, 무임승차자들을 제대로 처벌하기만 한다면, 원칙적으로 협력적 동맹이 진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정당한 몫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가혹한 처벌이 준비돼 있다면, 높은 수준의 협력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법 당국은 이번에 드러난 LH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우리 사회 공정의 분위기를 저해하는 이런 사기꾼들, 이런 무임승차자들을 일벌백계로 엄중하게 다스렸으면 좋겠다. 이것만이 허탈과 분노에 빠진 많은 국민을 위로해 주는 최선의 길일 것이다.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 인문예술 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