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무스(러셀 크로우)는 노예상에게 발견돼 검투사로 팔려 간다. 그는 무의미한 죽음에 자신을 내던지려 하지만 최고의 검투사가 되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의 칼을 간다. 사진IMDB
막시무스(러셀 크로우)는 노예상에게 발견돼 검투사로 팔려 간다. 그는 무의미한 죽음에 자신을 내던지려 하지만 최고의 검투사가 되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의 칼을 간다. 사진IMDB

“임종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기뻐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복 많은 사람은 없다.” (명상록)

철학자이자 ‘명상록’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로마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끝없는 영토 정복 전쟁으로 세계의 4분의 1을 통치했다. 하지만 위대한 황제도 마지막 순간만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을 즐겁게 기다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이 될 꿈에 부푼 아들, 네로와 칼리굴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된 코모두스였다.

서기 180년, 충직한 장군 막시무스는 황제와 함께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의 바람은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아내와 어린 아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황제는 최후를 예감한 듯 부족한 아들 대신 로마제국을 이끌어달라 당부한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었지만 막시무스는 황제의 신뢰와 제안을 냉정히 뿌리치지 못한다. 태양이 한쪽을 비추면 다른 한쪽에는 어둠이 내리는 법. 황제의 뜻을 알게 된 코모두스는 막시무스를 더 신뢰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목 졸라 살해한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죽음을 의심한 막시무스는 코모두스에게 충성맹세를 하지 않는다. 위협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을 젊은 황제는 막시무스와 그의 가족을 몰살시키라고 명한다. 처형장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고향으로 달려간 막시무스를 맞이한 것은 참혹하게 불타 죽은 아내와 아들의 시신이었다.

“인간을 분노하게 하는 시간은 찰나일 뿐, 그 짧은 순간 때문에 분개하고 고뇌하며 스스로 비참해지는 자야말로 어리석은 게 아니겠는가?” (명상록)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처럼 인생은 종종 운명의 주인공을 가장 높은 곳까지 천천히 밀어 올렸다가 순식간에 가장 낮은 곳으로 집어 던진다. 삶의 진리를 깨우친 현자에게는 그런 고난과 분노가 스쳐 가는 한 줄기 바람이겠지만 한낱 범부의 행복을 바랐던 인간은 어찌해야 할까? 더구나 막시무스의 불행과 고통은 끝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자신을 믿어주던 주군과 충성을 바쳤던 나라, 사랑하는 가족을 한순간에 잃고 기진맥진 쓰러진 막시무스는 노예상에게 발견돼 검투사로 팔려 간다. 그는 무의미한 죽음에 자신을 내던지려 하지만 최고의 검투사가 되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의 칼을 간다.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똑같아지지 않는 것이다.” (명상록)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자질도 경험도 부족했던 코모두스는 원로원을 만족시키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세간의 비난을 돌리고 인기를 얻기 위해 국고를 털어 연일 검투 시합을 개최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쏟아져야 할 환호를 한 몸에 받는 검투사가 나타난다. 코모두스는 그를 치하하기 위해 시기심을 감추고 검투장으로 내려온다.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어 맞이한 복수의 시간, 그러나 막시무스는 칼을 뽑을 기회를 찾지 못한다. 대신 투구를 벗고 자신의 생존과 결심을 알린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충신, 불타 죽은 아들의 아버지이자 살해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분개한 코모두스는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고 싶지만, 인기 절정의 검투사를 없애는 일은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안다면 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가? 길이 보인다면 기쁜 마음으로 따라가라. 만일 실패하게 되더라도 시도하다가 실패하라.” (명상록)

막시무스가 지옥으로 추락하는 데는 지금까지 그가 흘린 피와 땀, 그가 쌓아온 인내와 진심은 조금도 작용하지 않은 것 같다. 대체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복수의 선전포고를 하고서야 막시무스는 운명의 진의를 깨닫는다. 개인적 원한을 넘어 황제가 살아생전 당부했던 로마제국의 미래를 지키는 사명, 코모두스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는 책임. 그는 코모두스의 누나 루실라의 도움을 받아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혁명을 도모한다. 그러나 계획은 발각되고 관련자들은 체포돼 처형된다. 막시무스 역시 죽음이 예정된 검투장에 선다. 그는 이대로 허무하게 죽고 마는 것일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영화

2000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는 1964년 영화 ‘로마제국의 멸망’의 리메이크작으로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쇠망사’를 원작으로 한다. 스토리와 볼거리 많은 화면의 몰입도가 큰 작품이다. 다만 영화 속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전장에서 병사했고 일찌감치 외아들 코모두스를 차기 황제로 낙점했다. 따라서 황제가 공화정을 바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코모두스 이후에도 공화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코모두스가 폭군이 되는 계기는 아버지의 편애가 아니라 정치적 야심이 컸던 누나 루실라의 암살 시도였다. 그녀는 반란의 주모자로 처형됐다. 검투 경기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만 코모두스는 개인 공간에서 독을 먹은 상태에서 측근에게 교살당했다.

막시무스야말로 영화적 인물이다. 무엇이 팩트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비교해 보는 것은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이다. 강직한 막시무스는 러셀 크로우가, 불안한 폭군 코모두스는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했다.

“우리를 줄로 당겨 조종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 숨겨진 힘이어서 이것이 설득의 목소리요, 그의 인생이며 곧 그 사람이라 말해도 되리라.” (명상록)

막시무스가 코모두스에게 충성할 만큼 약삭빠른 사람이었다면 겪지 않았을 운명이었다. 로마제국 최고의 황제가 사상 최악의 폭군을 낳았다는 것도 역사가 증명하는 인생의 아이러니지만 황제 자신도 모르는 이유가 그의 삶 어딘가에 없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성군조차 자식과 미래를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다.

결과는 우리 몫이 아니다. 그래도 어떤 인생,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 내면을 자주 들여다볼 일이다. 막시무스도 아우렐리우스도 심지어 코모두스조차 앞서간 모든 이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한 가지다. “가고 싶은 길이 보인다면, 의심 없이 두려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걸어가라!”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