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자이너 제품으로 꾸민 공간 ‘꽃술’ 1층. 섬유작가 엄윤나가 설치한 샹들리에가 달려있다. 부드러운 크림색의 콘크리트 벽에 투명한 아크릴을 설치했다. 사진 이미혜
한국 디자이너 제품으로 꾸민 공간 ‘꽃술’ 1층. 섬유작가 엄윤나가 설치한 샹들리에가 달려있다. 부드러운 크림색의 콘크리트 벽에 투명한 아크릴을 설치했다. 사진 이미혜

오랜 준비 끝에 서울 용산구 원효로의 오래된 주택가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이름은 ‘꽃술(kkotssul)’. 기획자로 활동하기 위해 패션지에서 나올 때부터 준비해 온 프로젝트다. 원효로1가의 오래된 2층 주택을 개조한 꽃술은 한국의 디자이너가 만든 제품을 소개하고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는 ‘디자인 바(design bar)’다. 디자인 바라는 명칭이 아마 생소할 것이다. 당연하다. 얼마 전에야 내가 만들어낸 말이니까.

디자인 바는 갤러리·쇼룸·카페·바(bar) 등 기존의 용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공간이다. 10월 1일 정식 오픈한 꽃술은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모든 창작자를 위한 공간이자 누구나 이를 만지고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꽃술은 신소재나 전통과 융합한 새로운 기법을 활용한 색다른 한국적 디자인 제품과 이에 대한 판매 촉진 방안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안테나숍과 유사하다. 하지만 안테나숍은 파일럿 형식으로 운영되는 반면 꽃술은 지속해서 운영된다.

전시한 제품을 판매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복합문화공간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꽃술은 가구와 생활 소품뿐 아니라 주방, 문손잡이, 계단, 식물 한 포기까지 매장 내의 모든 제품을 판매한다. 손님들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계절 차와 우리 술도 준비했다. 음식은 제품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트롤리(trolley·음식과 술을 얹어 나르는 카트)를 이용해 서빙한다. 트롤리 역시 판매하는 상품 중 하나다.

꽃술에선 국공립 미술관이나 국내외 유명 갤러리에서나 볼 수 있었던 디자인 작품을 만지거나 사용할 수 있다. 1000만원이 넘는 고가의 가방도 들고 다니는데 가격으로만 보면 그보다 훨씬 저렴한 작품을 굳이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할 이유가 없다. 가방뿐만 아니라 디자인 제품이란 생활에서 사용하면서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물론 꽃술에서 전시하는 모든 제품은 디자이너의 개성과 특징이 녹아든 희소성 있는 수공예품이다. 하지만 예술과 기술, 디자인의 경계가 희미해진 요즘 같은 세상에 이곳에서 판매하는 것들을 굳이 ‘작품’과 ‘제품’으로 구분 짓고 싶지 않다. 꽃술은 공간 안의 모든 것을 판다. 심지어 이미지와 텍스트,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까지도.

꽃술을 찾은 손님들이 만지고 쓰는 제품은 나의 소장품이다. 위탁판매로 운영되는 여느 쇼룸이나 편집숍보다 운영자로서 부담이 크다. 이런 방식을 고집한 건 2003년부터 패션지 에디터로 일하며 고민해왔던 창작과 인식, 유통과 소통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미술 교과서 외에는 변변한 미술 관람의 기회도 없던 경남 창원의 시골 마을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런 내가 미술과 패션, 디자인에 대해 견해를 드러낼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패션지에서 근무한 경험 덕분이다. 미국 베벌리힐스의 미술관에서 열린 프라이빗 파티에서 유명 미술가 데이비드 호크니, 할리우드 영화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함께 칵테일을 마시고 온갖 국내외 전시와 럭셔리 행사를 찾아다니는 동안 나도 모르게 비교적 세련된 문화적 취향이라는 게 형성된 것이다. 그만큼 경험이 중요하다.


왼쪽부터 디자인 바 ‘꽃술’ 외관. 2층 무지개방. 젊은 목수 김지원이 만든 테이블과 낚시용품을 이용해 만든 모빌이 설치돼 있다. 수납장은 보는 방향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인다. 옥상에 있는 의자. 한지를 이용해 은은한 색감을 만들어냈다. 사진 이미혜
왼쪽부터 디자인 바 ‘꽃술’ 외관. 2층 무지개방. 젊은 목수 김지원이 만든 테이블과 낚시용품을 이용해 만든 모빌이 설치돼 있다. 수납장은 보는 방향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인다. 옥상에 있는 의자. 한지를 이용해 은은한 색감을 만들어냈다. 사진 이미혜

디자인은 아는 만큼 보인다. 안다는 건 사진이나 책으로 보고 상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경험하고 오감으로 느끼는 것을 포함한다.

창작자가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도, 또 이를 알아보는 소수의 전문가가 의미 있는 전시나 행사를 기획한다 해도 정작 대다수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소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유통은 가능할까. 유통이 막히면 작품은 돈이 되지 않는다.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게 먹고사는 문제다. 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사명을 띠고 꽃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곳에서 보고 만지고 느끼고 사고, 다시 자신의 집에서 보고 만지고 느끼고. 그리고 그 좋은 경험의 기억들이 축적돼 또 다른 창작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더 좋은 경험을 얻어가도록 하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기획자였고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 줄 알았으며 알고 있는 작가와 디자이너들이 넘쳤다. 그 덕분에 내 몫의 인건비를 들이지 않았고, 초기 투자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지난 2월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길고 긴 개조 공사를 끝낸 꽃술은 제법 예쁘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68년에 지어진 2층 규모의 연와조(빨간 벽돌 건물) 내의 무허가 가벽을 철거하고, 1m 가까이 바닥을 덮고 있던 연탄보일러와 가스보일러를 들어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지하 벙커가 나타나면서 잠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되는 건 거의 없었다. 집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 나갔다. 기둥도, 계단도 집에 맞춰 우리가 계획을 바꿔야 했다.

주로 전시 공간 디자인과 전시용 가구 및 집기를 만들어온 디자이너들이 꽃술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노부부가 아들 셋을 장가보낼 때까지 수십 년간 살아온 점포 주택을 상업 공간으로 만들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비스포크(bespoke·맞춤 생산하는) 주방 가구와 조립식 선반을 만들고, 바닥재와 문고리 하나까지 한국 디자이너들이 지속해서 생산·판매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작업했다. 꽃술 옥상에는 배롱나무와 자엽안개나무를 비롯한 한국 식물을 가득 심었다. 앞으로는 나무와 꽃도 화분과 함께 판매할 예정이다.

꽃술은 디자인 전문 잡지 ‘타이거 프레스(tiger press)’ 발행도 준비 중이다. 꽃술이 1년에 두 번 발행할 ‘타이거 프레스’ 첫 호의 주제는 ‘원효로77길 33’, 바로 꽃술이다. 꽃술은 강력한 도시개발 정책을 펼쳤던 김현옥 전 서울시장의 재임 기간에 지어진 도시 주택 중 하나다. 이를 통해 1960년대 서울을 뒤덮고 있던 무허가 판자촌 건물과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등 당시의 도시 건축 상황을 더듬을 것이다. 또 철거 당시에 발견된 이 집의 과거와 50년 이상 이 동네에서 살아온 오랜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간의 자아를 찾아가고자 한다.

‘꽃술’과 ‘모이다’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 한자 ‘蘂(꽃술 예, 모일 전)’처럼 꽃술은 많은 사람과 물건이 모이고 가능성이 피어나는 작은 중심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먹고 즐기고 감사하는 동안 우리 일상 속 디자인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