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테오도르(사진·호아킨 피닉스)는 별거 중인 아내 캐서린을 만나 이혼서류에 사인한다. 근황을 묻는 캐서린에게 그는 인공지능 OS인 사만다와 사귀고 있다며 들떠서 말한다. 캐서린은 기가 막혀 쏘아붙인다. “서로 맞춰가는 게 아니라 순종적인 아내를 원했었지. 이제 딱 맞는 상대를 찾았네. 당신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허깨비 같은 관계를 원할 뿐이야.” 사진 IMDB
마침내 테오도르(사진·호아킨 피닉스)는 별거 중인 아내 캐서린을 만나 이혼서류에 사인한다. 근황을 묻는 캐서린에게 그는 인공지능 OS인 사만다와 사귀고 있다며 들떠서 말한다. 캐서린은 기가 막혀 쏘아붙인다. “서로 맞춰가는 게 아니라 순종적인 아내를 원했었지. 이제 딱 맞는 상대를 찾았네. 당신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허깨비 같은 관계를 원할 뿐이야.” 사진 IMDB

손 편지 대필 회사에서 일하는 테오도르는 달콤한 사랑 고백을, 감동적인 프러포즈를, 결혼기념일 축하를 편지글에 담아 타인의 사랑을 완성하는 재능을 가졌지만 아내 캐서린의 마음을 잡지는 못했다. 이혼을 원하는 아내와 별거 중인 그는 서류에 사인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중이다. 그녀를 변함없이 사랑하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외로움에 지쳐가던 어느 날,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아는 직관적 실체. 또 하나의 의식’이라는 광고에 솔깃, 인공지능 운영체제(OS)를 구입한다.

시스템은 테오도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 뒤 그에게 꼭 맞는 성격의 인공지능으로 작동된다. 그때부터 여성의 목소리로 자신을 사만다라 이름 지은 OS는 테오도르와 24시간 함께하게 된다. 18만 개의 단어를 훑어보고 이해하고 선택하는 데 단 0.02초면 충분한 사만다는 필요한 정보를 바로 찾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스케줄을 관리하고 컴퓨터 파일들을 정리해주는 것은 물론 편지를 대필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셔츠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기기와 이어폰을 통해 사만다와 생각을 나누게 된 테오도르는 오랜만에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위안과 행복을 느낀다.

스스로 생각하고 진화하는 인공지능답게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감정까지 리드한다. 침울해 있는 그를 격려하고 일으켜 세워 웃게 하고 노래하고 춤추게 한다. 테오도르는 멀리 있는 애인과 통화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만다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대부분의 사랑은 눈으로 시작되지만 그 사랑을 오래 머물도록 붙잡는 건 귀다. 지적인 미모를 떠올릴 수 있는 이성의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간질이며 속삭여주는 것만큼 자극적인 게 또 있을까. 테오도르는 이제 사만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사만다도 처음 느껴보는 인간의 감정을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소프트웨어와 사랑에 빠지다니! 아무리 미래세대라지만,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년 후인 2025년. 그러나 이 황당한 설정이 조금도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 덕분이다. 분절되는 기계음이었다면 테오도르와 감독을 비웃었을 관객은 매력적인 여배우의 음성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얼굴과 섹시한 몸매를 상상하게 된다. 설사 그녀를 모른다 해도 허스키 보이스의 솜사탕 같은 목소리는 관객을 꿈꾸게 한다. 운영 시스템이나마 저런 목소리와 대화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서로에게 실재하는 이성으로 인식된다. 손잡을 수 없고 안을 수 없고 체온을 느낄 수 없다는 안타까움, 그러한 결핍이 그들의 사랑을 더 뜨겁게 한다. 연애를 시작한 세상의 모든 연인이 똑같이 느끼는 갈망이다.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현실에서는 결혼이다. 아침에 눈 뜨면 보이는 얼굴, 지정된 장소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 서로 원하면 언제나 안을 수 있는 상대.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이야기로 웃게 해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멋있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사이, 그래서 누군가는 그 상태가 영원하길 원하지만 또 누군가는 변화하길 바라게 되는 관계. 어느 쪽이든 자신의 바람이 상대에게서 충족되지 않는다고 의식될 때, 그 상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될 때 결혼생활은 시들해지거나 대립하거나 마침내 떠나간다.

테오도르와 캐서린도 그런 이유로 헤어졌을 것이다. 사만다가 마음의 한 구석을 채워주자 자신감을 회복한 테오도르는 미루고 망설였던 캐서린을 만난다. 이혼서류에 두 사람 모두 사인한 뒤 근황을 묻는 캐서린에게 그는 인공지능 OS인 사만다와 사귀고 있다며 들떠서 말한다. 그가 정말 행복하길 바랐던 캐서린은 기가 막혀 쏘아붙인다. “서로 맞춰가는 게 아니라 순종적인 아내를 원했었지. 이제 딱 맞는 상대를 찾은 거네. 당신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허깨비 같은 관계를 원할 뿐이야.”

정신과 의사 모건 스콧 펙은 그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개인의 한계를 확장해나가는 진화 과정, 그리고 스스로 성장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오도르에게 애착을 느끼면서도 몸이 없는 사만다는 보통의 연인들처럼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데 절망한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자아를 형성해간다.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알기 위해 인간과 우주에 관한 모든 지식을 배워가던 그녀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안정이란 상자 안에 갇혀 한결같이 머물길 바랐던 테오도르를 캐서린이 떠났던 것처럼, 사만다도 그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변화와 성장을 감당하지 못하면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누구나 조금씩 성장하고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다. 너무 빨리 자란 사만다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또 한 뼘 성장한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대필이 아닌, 자신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캐서린에게 보낸다. “당신이 어디에 있건, 함께 성장해온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보여준 것처럼 매우 독특한 시선을 갖고 있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각본까지 쓴 이 작품은 미국작가조합 각본상, 골든글로브 각본상, 2014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을 만큼 시나리오가 특별하다. ‘글래디에이터’에서 코모두스 황제 역으로 악역 카리스마를 내뿜던 호아킨 피닉스가 부드러운 남자 테오도르를, 최근 그와 약혼 발표를 한 루니 마라가 헤어진 아내 캐서린을 연기했다. 테오도르의 좋은 이성 친구 역을 맡은 에이미 아담스도 영화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6년 뒤 우리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세상을 살게 될까, 만약 스칼렛 요한슨이나 브래드 피트와 같은 세계적 스타의 목소리 서비스를 선택해 장치할 수 있는 OS가 출시된다면, 스마트폰을 한시도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는 분명 또 다른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되지 않을까.

그래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길 바란다면, 모자라고 부족해서 싸우고 지지고 볶아야 할지라도 추울 때 손잡을 수 있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빌려줄 사람을 사랑하길 고집한다면, 너무 아날로그적인 원시인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