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전문가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오른쪽)과 신입사원 나탈리(안나 켄드릭). 라이언은 “왜 화상통화를 하지 않고, 굳이 비행기까지 타고 와 해고대상자와 대면해야 하느냐”고 묻는 나탈리에게 이렇게 답한다. “우리 업무는 해고자들이 견딜 수 있도록, 상처받은 그들을 공포의 강 너머,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곳까지 보트로 데려가는 거야. 그런 다음 보트를 세우고 물속으로 밀어 넣어 수영하게 하는 거지.” 사진 IMDB
해고전문가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오른쪽)과 신입사원 나탈리(안나 켄드릭). 라이언은 “왜 화상통화를 하지 않고, 굳이 비행기까지 타고 와 해고대상자와 대면해야 하느냐”고 묻는 나탈리에게 이렇게 답한다. “우리 업무는 해고자들이 견딜 수 있도록, 상처받은 그들을 공포의 강 너머,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곳까지 보트로 데려가는 거야. 그런 다음 보트를 세우고 물속으로 밀어 넣어 수영하게 하는 거지.” 사진 IMDB

미국 전역으로 출장을 다니는 라이언 빙햄은 1년 365일의 대부분을 비행기와 호텔에서 보낸다. 세상은 결혼하고 집을 사고 자식을 낳아 가정을 꾸리는 것을 정상궤도라고 말하지만 그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불안정한 상태(up in the air)가 편하다. 작은 캐리어 하나와 신용카드만 있으면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자유, 내 한 몸 말고는 책임질 것 없는 홀가분함이 그에겐 가장 중요하다.

라이언은 해고전문가다. 기업을 대신해서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근무일입니다”라는 말을 직원에게 통보해주고 뒤탈이 없도록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10년, 20년, 30년, 젊음을 바친 회사에서 해고통지를 받는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꿈이 좌절됐다고 절망하는 사람은 없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그 결과가 이거야?”라며 분노하다가 가장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떠올리고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회사에서 잘렸단 말을 할 수는 없어요”라고 울먹인다. 주택대출금과 자녀 교육비, 건강보험료 걱정에 눈앞이 캄캄해진 그들은 자리에서 쉽게 일어서지 못한다.

해직을 알리고 그들의 분노와 절망을 매일 마주봐야 하는 것은 라이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직업에 대한 분명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 그는 신입사원 나탈리에게 말한다. “우리 업무는 해고자들이 견딜 수 있도록, 상처받은 그들을 공포의 강 너머,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곳까지 보트로 데려가는 거야. 그런 다음 보트를 세우고 물속으로 밀어 넣어 수영하게 하는 거지.”

효율성과 경비 절감을 위해 나탈리가 제안한 인터넷 화상 해고통보 방식을 반대하는 이유다. 헤어지자는 애인의 문자를 받고 그녀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을 때, 모니터 화면으로 해고하는 거랑 다르지도 않은데 왜 상처받느냐고 비꼬기도 한다. 인간이란 결국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것이라며 자신의 인생관을 내심 자부한다.

“어떻게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날 수 있죠?” 하지만 나탈리가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반복해서 묻고 따지자 라이언은 그동안 외면해온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인생에서 안전한 선로는 없으며 기업이든 개인이든 영원히 돈독한 관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궤도에서 이탈했을 때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여동생의 결혼식을 계기로 그는 가족이란 울타리 안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을 밀어 넣는다. 출장 스케줄이 맞을 때만 잠깐씩 만나던 알렉스와의 관계도 되짚어본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달려가는 방향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그녀와 함께라면 정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라이언은 마음 설레며 알렉스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린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전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짬이고 휴식이고 잠깐의 쉼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화가 나고 약도 오르지만 냉정하게 뒤집어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나를 점령해달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조차 내가 외롭지 않을 만큼만 함께 있어주는 것, 그리고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내가 옳다고 편들어주며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고 격려해주길, 심지어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제발 방해하지 말아주기를 바라는 것 아닐까?

하물며 능력에 따라 직위와 연봉을 계약하는 직장은 어떨까? 해고를 두려워하는 건 소득의 단절과 불안한 미래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내면적인 원인은 그 어디에도 영원한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회사가 내 가치를 몰라준다는 배신감, 내가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는 절망과 자괴감이 아닐까.

“언제쯤 이 일을 관두고 좋아하는 일로 복귀해서 행복을 찾을 계획이었나요?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모두 해직당한 경험이 있어요. 당신에게도 기회가 온 겁니다. 도전하세요.” 닳고 닳은 립 서비스일 것이다. 그래도 라이언은 말하는 순간만이나마 스스로 믿고 싶었을지 모른다. 안정은 정체이며 포기는 죽음이고, 희망과 도약만이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해고가 아니라도 내 존재가 거부당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최선을 다했는데 시험에 떨어지거나 취업에 실패했던 경험, 내 편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중요한 순간 입을 다물거나 등짝을 후려치고, 죽을 만큼 사랑한다던 연인은 목숨 바칠 새로운 대상을 찾았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악쓰지 않으려고 어금니 깨물어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반대로 싫증 나버린 애인에게 헤어지자고 말해야 했을 때, 어렵게 부탁했을 친구의 얼굴을 외면하며 매정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던 상황, 꼭 지키리라 다짐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번복하고 잊어버린 약속으로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했던 적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 입학과 졸업, 취업과 퇴직, 창업과 폐업, 고용과 해고. 우리는 이분법의 한가운데를 살아간다. 시작과 끝, 그 어떤 것도 좋거나 나쁘지 않다. 둘 중 어느 하나만을 택할 수도 없다. 한쪽을 부정하는 순간 다른 한쪽도 사라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반복해서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거절당하는 순간의 수치심은 배신감으로, 분노로, 죽음을 떠올려야 할 정도의 절망으로 바뀐다. 다리 위에 올라가 강에 몸을 던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패배에 비겁하게 승복하지 않는다. 주먹 불끈 쥐고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세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향해 매 순간 발돋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여기, 당신이 있는 이유!

라이언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저 높은 하늘, 구름 속으로 다시 날아오른다. 모두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남들과 다른 길일지라도 내게 주어진 삶이기에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 뿐.

‘위플래쉬’를 기획했던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과 설명이 필요 없는 조지 클루니가 조금은 쓸쓸하지만 재미있고 마음 따뜻해지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다 조금씩 성장해가는 사회 초년생 나탈리와 너무 쿨해서 얄밉기도 한 매력녀 알렉스가 비행기의 양 날개처럼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준다. 2010년 아카데미 각색상, 골든 글로브 각본상, 미국작가조합 각색상, 전미 비평가협회 4개 부문 수상 등등, 각종 상을 석권한 수작이다.

해고전문가라는 직업은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에서 해고통보에 응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촬영 당시 갓 해직된 일반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영화의 진실성과 무게감이 더해진다. 무엇보다 라이언의 마지막 내레이션, “별은 많은 사람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어두운 밤 나는 그 별들 사이를 날아간다”는 문장을 떠올릴 수 있다면 살아가면서 가장 외롭고 힘든 순간을 만나게 될지라도 고개 끄덕이며 마음 깊이 자신을 긍정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꼭 그렇게 되기를!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