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혜화동 일대는 1910년대 토지가 개발되고, 경제력을 갖춘 주민들이 유입되면서 부촌으로 떠올랐다. 사진 조선일보 DB
서울 혜화동 일대는 1910년대 토지가 개발되고, 경제력을 갖춘 주민들이 유입되면서 부촌으로 떠올랐다. 사진 조선일보 DB

서울 혜화동 일대 경성 동북부 지역은 1910년대부터 대규모 기관·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토지 개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국유지와 관유지를 경매로 매각하면서 이 지역의 약 198만㎡(60만 평)의 토지가 밭에서 대지로 전환됐다. 경매에 참여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목적은 달랐다. 조선인은 거주를, 일본인은 투자를 목적으로 토지를 입찰받길 원했다. 즉, 주거를 위해 밭에서 대지(垈地)로 용도를 변경하게 되고, 투자를 위해 아무것도 없는 땅에 주택 개발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1920년대 또한 총독부에 의한 토지 불하가 이뤄졌다. 시가지 확장을 명목으로 총 66만㎡(2만 평)가 넘는 임야가 대지로 개발됐다. 이 과정에서 큰 필지는 여러 소유권자에게 넘어가 작은 필지로 분할되고, 용도 전환이 이뤄졌다.


토지 개발되며 경제력 갖춘 주민 유입

토지 개발은 지역 주민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1917년과 1927년 필지별 토지 소유자가 기록된 자료를 통해 지역민의 구성 변화를 파악하면, 조선인과 일본인이 혼재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때 유입된 주민은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동북부 지역은 ‘학교촌’ 혹은 ‘문화촌’으로 불리며, 경성 사대문 지역에서 뉴타운적 성격(편리한 교통, 쾌적한 주거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또 주거단지로서 경쟁력이 있었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거주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새로운 계층의 조선인과 함께 일본인이 대거 유입됐다는 얘기다.

실제 거주민의 직업과 그에 따른 경제력을 살펴보면, 중상류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회사원, ‘월급쟁이’로 불렸다. 당시 ‘월급쟁이’는 부유층과 중간계층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으로 꼽을 정도로 인기 있는 직업군이었다. 1924년 발행된 ‘운수 좋은 날’에서 김 첨지가 동소문 안으로 들어와 인력거에 태운 사람은 마마님과 교사인 듯한 ‘양복쟁이’였다. 재력 있는 집안의 여인과 선생이 혜화문 안 동북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외에 은행업 종사자도 있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수도 연건동에 전세로 산 주민이었다. 소설가 이광수도 숭3동에 살았다.

일제강점기 직업별 임금을 살펴보면, 동북부 지역 거주민의 경제적 위상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목수(木手)와 석수(石手), 우마차 인부(牛馬車 人夫) 등과 같은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조선인 11원, 일본인 22원이었다. 당시 월급쟁이는 월 60원의 임금을 받았다. 월 60원 임금은 상당히 높은 보수에 속했는데,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자 월급이 이에 해당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살았던 총독부 의원과 경성제국대학 종사자들(교수, 의원 약제관, 교사, 사무관 등)의 월 임금은 기자 월급의 몇 배에 이르렀다. 특히, 경성제대 교수 월급(100~375원)은 경제적으로 상류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이었다. 따라서 동북부 지역은 경제적으로 중상류층 이상 그리고 엘리트가 거주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동북부 지역의 위상 변화, 선망받는 주거 지역으로의 변화는 당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1929년 9월의 ‘별건곤’ 잡지는 ‘문화촌’과 문화생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문화촌이라면 소위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들…, 집은 신식 양옥으로 지어 놓고 피아노에 맞춰 흐르는 독창 소리 아니면 유성기판(축음기판)의 재즈밴드 소리쯤은 들려 나와야 하고 지붕 위에는 라디오 안테나가 걸쳐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루에 한 번씩은 값싼 것일망정 서양요리 접시나 부서야 문화생활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칸 셋방이 어렵고 한 그릇 콩나물죽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조선 사람이, 더구나 찌들고 쪼들리는 서울 사람 중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 것인가?”

당시 상당한 생활 수준을 영위해야 문화생활이라 말할 수 있었을 테지만, 경성 거주 일반인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면 이러한 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해당 잡지는 동북부 지역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면 조선 사람만이 모여서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 소위 문화촌은 어디냐? 동소문(혜화문) 안 근방을 칠까? 문화생활이라고 반드시 양옥을 짓고 위에 말한 것 같은 생활이 문화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중략) 재미있고 화락한 생활을 하는 것을 문화생활이라고 하기에 넉넉하다. (중략) 그들(동소문 안 거주민)의 살림은 대개가 간단하고도 정결하다. 대개가 회사원이거니와 그 외 기타 여러 곳에서 월급쟁이로 다니는 사람이 많고 식자층이 한적한 곳을 찾아 새로이 주택을 짓고 간편하고 깨끗한 살림을 하고 있다. 아직은 전부라 할 수가 없으나 앞으로는 그 근방은 교통도 더 편리해지면 조선 사람의 문화촌으로(는) 이곳밖에는 없고 다른 좋은 곳들은 다 빼앗겼다.”

즉, 1920년대 후반 동북부 지역은 나름 경제력을 갖추었거나 식자층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조선인 거주 지역 중 경성 안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문화촌’이라고 불릴 만한 지역으로 소개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거친 동북부 지역은 도심지에 비해 땅값이 저렴하고, 공기 좋고, 조망 좋은, 살기 좋은 주거 지역으로 성장했다.


살기 좋은 주거 지역으로 손꼽혀

이후 1930년대에도 그 명성은 이어졌다. 한 신문 기사에서는 혜화동과 명륜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 가운데서도 제일 살기 좋은 곳이 혜화정·명륜정이라고 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만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최근 장안에 주택지를 잡으려면 동네가 새집들로 깨끗하고 공기 좋은 곳을 첫손 꼽기에 모두들 서슴지 않으리라. 자랑거리로는 이뿐만 아니라 옛날 성현을 모셨던 경학원(經學院)이 명륜정 한복판에 있으니 일반 정내의 문교상에도 말할 것도 없고 또 그 부근에 고송(古松)이 정립하여 있으니 풍광조차 좋아서 이 동네의 공원인 양 하여 정내에서는 장래 이곳에 공원이 설치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서쪽으로는 장안 인사의 생활에 시달린 초조한 넋을 위로하여주는 동물·식물원이 있고 봄날의 한창 핀 벚꽃으로서 유명한 창경원(昌慶苑)이 있는가 하면 동남으로는 조선의 최고 학부인 경성제국대학이 웅자를 자랑하고 있다. 경제력을 따져 보더라도 혜화정은 장안에서도 유수한 부자 동네로서 이 또한 이곳 정리를 위하여 든든한 일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혜화동과 명륜동은 깨끗하고 공기가 좋아 주거 지역으로 손꼽히는 동네였다. 주변의 자연환경과 교육 환경,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망 구축은 인기 있는 지역으로 만드는 기반이 됐다. 이는 비단 혜화동과 명륜동뿐 아니라, 인근에 경성제대가 있던 연건동·동숭동까지 그 영향권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동북부 지역은 개발의 변화를 거쳐 1930년대 고급 주거지로 성장했다. 19세기 후반까지 상업 종사자 주거지였던 동북부 지역이 20세기 초반 경성에서 중상류층 지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