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스트맨’의 한 장면. 사진 퍼스트맨 스틸
영화 ‘퍼스트맨’의 한 장면. 사진 퍼스트맨 스틸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노예 제도의 야만성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별 세계의 비밀을 캔다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질문이다. ‘노예’라는 단어만 아니었다면 올해나 지난해쯤 나사(NASA·미국 항공우주국)의 기자회견이나 대통령 정책토론회에 나왔음 직한 질문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처음 역사에 기록된 순간을 찾으려면 꽤나 먼길을 거슬러가야 한다.

언제부터일까. 우주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에 경제 논리와 현실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 게. 노예 제도라는 표현이 나오는 걸 보니 19세기 미국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아니면 르네상스가 꽃을 활짝 피웠던 15세기의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나온 말일까. 유감스럽게도 모두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몽테뉴에 따르면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낙시만드로스였다. 그리고 질문을 받은 이는 역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였다. 두 사람이 살았던 건 기원전 6세기쯤이니 처음 이 질문이 역사에 등장한 지도 얼추 2600년은 더 된 셈이다. 당장 눈앞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왜 하늘 위의 별 세계에 대해 고민해야 하느냐는 질문의 역사는 이렇게나 오래됐다.

어떤 질문들은 정답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정답을 찾아 헤맬 뿐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해결이 나지 않는다. 영원한 교착 상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이 그렇다. 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이런 질문도 마찬가지로 정답이 없다. 그렇기에 정답을 찾는 과정 자체가 정답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이다. 정답 따위 포기해버리면 되지 않냐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런 질문이 우리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별 세계의 비밀을 도대체 왜 알아야 하느냐는 질문도 그렇다. 예산이나 세금 같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정답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지고 만다. 다행히도,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다만 우리는 종종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할 때가 있는데, 이따금 어떤 계기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데이미언 셔젤의 신작 ‘퍼스트맨(First Man)’이 아마 많은 이들에게 그런 계기가 될 것이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로 이미 자신만의 세계관을 공고히 한 스타 감독이 선택한 차기작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던 닐 암스트롱의 이야기다.

1969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이 남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미언 셔젤은 사실은 우리가 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그가 달에 발자국을 남겼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가 왜 달에 가고자 했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달에 착륙하는 순간 그가 느꼈을 환희는 짐작할지언정 그가 느꼈을 고독은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됐다는 건 알지만 그걸 위해 그가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모른다.

데이미언 셔젤은 141분간에 걸쳐 우리가 놓쳤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우리는 닐에게 병으로 세상을 등진 어린 딸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아폴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여러 동료가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동료를 잃고 난 어느 밤, 닐은 망원경을 들고 뒤뜰로 나가 한없이 달을 바라본다. 그의 곁에 있다 사라진 소중한 존재들이 달에 숨어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달을 올려다보는 그의 뒷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던 영웅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스포트라이트 속에 영웅으로만 기억되던 그의 뒷모습을 우리는 숨죽인 채 지켜본다.

영화 속에서도 닐은 왜 달에 가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의원들은 소중한 세금을 펑펑 써대는 나사와 닐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건 보통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달 탐사에 쓸 돈으로 의식주부터 해결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종류의 불만은 타당하다. 논리적이고 설득력도 있다. 아마도 논리적으로 정답을 찾으려면 그 누가 오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이니까.


영화를 본 후 보게 되는 밤하늘

‘퍼스트맨’의 성취는 이 지점에 있다. 데이미언 셔젤은 정답을 주려고 하지도 않고 논리의 영역으로 문제를 끌고 가지도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닐이 달에 도착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퍼스트맨’의 모든 장면은 이 순간을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닐이 달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의 환희와 고독 그리고 그 순간의 압도적인 풍광. 황홀하고 경이로운, 그야말로 ‘시적’인 순간이다.

아마 ‘퍼스트맨’을 본 많은 이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것이다. 별빛은 도시의 불빛에 잠겨 있겠지만 우리는 어두운 밤하늘 어딘가에 별이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우리가 우주를 향하는 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퍼스트맨’의 닐을 보고 있으면 ‘그래비티’의 라이언 스톤 박사가 떠오른다. 그들은 지구에서 딸을 잃었고 우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의 중력이 사라진 망막한 우주 공간에서 그들은 잃었던 무언가를 찾았고 다시 지구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주는 우리를 위로하고 때로는 구원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비서실을 무대로 한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에서 대통령 비서실 차장으로 나오는 조시 라이먼이 우주 탐사 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 말을 마지막으로 옮긴다.

“보이저 1호가 지구에서 130억㎞ 떨어진 말단충격 지역을 막 통과했어. 인간이 만든 기계가 최초로 태양계를 떠난 거야. 보이저 1호는 외계 생명체를 만날 경우를 대비해 55개국의 언어로 된 인사 메시지와 여러 음악을 담고 있어. 1920년대 블루스 음악가 블라인드 윌리 존슨의 노래도 담겨 있어. 존슨의 새엄마는 외도하다가 들켜서 남편에게 맞은 뒤 일곱 살짜리 존슨의 눈에 잿물을 뿌려서 눈을 멀게 했어. 그는 무일푼으로 폐렴에 걸려 죽었어. 집이 불탄 뒤 그 폐허 위에 젖은 신문을 덮고 자다 그렇게 됐어. 하지만 그의 음악은 방금 태양계를 떠난 거야.”


이 영화엔 이 술

블루문(Blue Moon)

달은 지구의 단짝이었던 만큼 달과 관련된 술도 적지 않다. 그래도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역시 블루문이다. 요즘은 같은 이름의 맥주가 유명하지만 이 영화에는 드라이진과 바이올렛 리큐어를 사용한 칵테일이 어울린다. 블루문은 양력을 기준으로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경우 두 번째로 뜬 보름달을 일컫는 말이다. 달은 늘 하늘 위에 있지만 블루문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블루문 칵테일은 ‘불가능한 상담’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오늘 밤엔 블루문이 떴을지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