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 안과 밖으로 이동하는 통로로 이용된 혜화문. 사진 조선일보 DB
조선시대 한양 안과 밖으로 이동하는 통로로 이용된 혜화문. 사진 조선일보 DB

1980년대 서울 강남이 개발된 이후 8학군 열풍이 불면서 현재의 많은 사람들이 교육 1번지로 강남을 꼽는다. 그런데 1980년 강남 개발 이전, 서울에서의 교육 1번지 혹은 선망되는 초등학교가 있었던 지역은 어디였을까.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혜화초등학교가 선망의 대상이었고 혜화동 일대가 서울에서 학군이 좋았던 지역이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지금이야 강남이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으나, 20세기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혜화동은 재력가들과 정·재계 인사들의 거주지역이었다. 일제시대, 대한의원(현 연건동 서울대학병원)과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서며 중산층 이상의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이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이후 해방을 거쳐 1970년대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였다.

당시 신문에는 이런 글도 실렸다. “돈 있는 사람도 살기 좋고 돈 없는 사람도 살기 좋은 서울이라고 요즘 시골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고 있는데, 이같이 좋은 서울 가운데서도 제일 살기 좋은 곳이 혜화정, 명륜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기를 조금만 뒤로 돌려서 19세기로 가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혜화동을 포함한 한양 동부지역(혜화동, 명륜동, 연건동, 동숭동 일대)은 성균관 주변을 제외하고는 한양도성 내부임에도 개발이 엄격히 제한된 일종의 미개발지역이었다.

한양 동부지역 일대는 매우 다층적인 역사성과 장소성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미개발지에서 일제시대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중상류층이 함께 거주하는 뉴타운으로 그리고 해방 후 교육 1번지에서 1980년대 이후에는 젊은층이 모이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변신했다.

조선시대 한양은 크게 중부와 서부, 남부, 북부, 동부 이렇게 5개의 행정구역(부·部)으로 구성됐다. 이 중 동부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됐으나, 다양한 역사성과 장소성을 갖고 있는 동부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동부의 지역적 범위는 한양 도성 내부에서 청계천 이북 지역으로 창덕궁·창경궁·종묘 동쪽지역이다. 그리고 이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는 성균관과 경모궁, 혜화문이 있었다.

한양 성곽에는 4개의 대문(大門)과 4개의 소문(小門), 총 8개의 문이 있었다.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은 대문으로서 역할을 수행했으나, 북쪽의 숙정문은 대문임에도 불구하고 지형상의 이유로 대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실질적인 (북)대문 역할은 혜화문이 맡았다.

혜화문은 흥인문(東大門)과 북악산 고개에 세워진 숙정문(北大門) 사이 동북 방향으로 나있는 소문으로, 현재의 혜화동 로터리에서 4호선 한성대입구역 사이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숙정문과 이어진 경원가도(京元街道)는 혜화문을 통해서도 연결되기 때문에, 보행자 입장에서 굳이 북악산(北岳山) 고개에 있는 숙정문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혜화문은 숙정문을 대신해 한양 도성 안과 밖을 이동하는 통로로 이용됐다.

한양은 자급자족이 힘든 도시여서 외부의 물자 유입이 필수적이었고, 혜화문 역시 인구와 상품 유출입이 활발했다. 일반적으로 물류 통관 길목인 성문 인근에 거주지와 시장이 조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 때까지도 혜화문 일대는 빈집이 많고 한산하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는 창덕궁 근접지역이라는 지리적·지형적·정치적 요인과도 관련된다. 궁 주변에 북악산과 낙산(駱山) 그리고 궁궐 옆의 언덕(현 서울대학병원)이 있는데, 산과 언덕에 인가가 형성되면 궁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기에, 인가가 들어서는 것이 제한적이었다.

창덕궁에서 거처하던 연산군이 궁 인근 민가 철거를 명할 정도로 경복궁 담 밖으로 일정한 거리만큼 백성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던 것처럼 창덕궁 역시 민가 형성이 제약됐다.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이 전소돼 창덕궁으로 정궁을 옮긴 후에도, 동부 지역 민가 형성은 18세기 중후반까지 정체됐다.


성균관 주변 상인층 번성하면서 변모

※ 행정경계가 표시되어 있는 ‘최신경성전도(最新京城全圖)·1907년’.
※ 행정경계가 표시되어 있는 ‘최신경성전도(最新京城全圖)·1907년’.

동부지역 중 그나마 거주지가 형성된 지역은 성균관 주변이었다. 성균관은 국가가 설립한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조선 건국 후 1397년(태조 6)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전했다. 성균관의 잡다한 일을 하기 위한 노비들이 필요했는데, 이들을 반인(泮人)이라고 불렀다. 반인들은 성균관 주변에 집단으로 거주했고, 이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반촌(泮村)이라고 했다.

성균관 유생은 성균관에서 허가하지 않은 여가생활을 반촌에서 즐길 수 있었고,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는 경우 반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또 반촌은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상경한 이들을 위한 임시 거처로도 활용됐다.

반인은 노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에서 일한다는 중요성을 인정받아 조정(朝廷)으로부터 상당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성균관 제사와 유생들의 식사에는 쇠고기가 사용됐는데, 조정은 소 도살 권한을 이들 반인에게 부여했다. 당시 조선은 우금정책(牛禁政策)을 실시했기에, 소 도살은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반인은 성균관 내에 설치된 도사(屠肆·현재의 소 도축장)에서 소를 도살했고, 이들은 도살 후 남은 쇠고기와 부속물 판매를 허락받았다. 우금정책이 펼쳐지는 조선에서 소 도살 권한과 쇠고기 및 부속물 판매권은 상당한 특혜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성균관은 전쟁으로 인해 재원확보가 어려워져 운영난을 겪었다.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성균관은 반인의 경제·상업활동을 지원했다. 반인에게 현방(懸房)이라 명명한 쇠고기 판매 점포를 한양 곳곳에 설치, 운영하게 했고 현방 운영 수익의 일부는 성균관 재원으로 사용됐다.

반인층은 현반 운영에 필요한 전문 도살업자인 거모장을 고용하기도 했고 이들을 ‘반인의 노예’라 부르기도 했다. 또 사료에 의하면 이들의 의복과 혼인이 사치스럽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비록 신분은 낮으나 강력한 경제력을 갖추게 된 반인 상인층이 부유층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반인의 경제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반촌의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반인이 다른 사람을 고용함으로써 반촌 내로 인구가 유입됐고, 반인이 방역(坊役)을 면제받으면서 경제적 부를 획득하자 일부 계층이 반인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반촌으로 들어갔다. 즉, 동부지역 성균관 일대 반촌의 공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추정컨대 반촌은 초기의 명륜동 일대를 넘어서 혜화동 지역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재의 주요내용은 유슬기, 김경민의 논문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 동부지역의 상업도시화 과정’(서울학연구 2017)을 참조했다.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