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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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몇 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남부의 한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살다 왔다. 귀국하는 날, 딸은 출국심사장을 통과하자마자 공항 내 편의점으로 달려가 매운맛으로 유명한 ‘불닭’ 어쩌고 하는 라면을 샀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의 외식 메뉴는 곱창구이였다. 노릇노릇하게 익힌 곱창을 매콤한 소스에 찍어 무척 맛있게 먹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 딸 역시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한국인’이었다. 최근 십여 년 동안 한국인은 매운맛의 극한이라도 추구하는 듯하다. 불닭 요리나 매운 떡볶이, 매운 짬뽕 등 매운 요리를 취급하는 식당이 꽤 많다. 조금만 매운 음식을 먹어도 장이 탈 나는 나 같은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다.

우리는 지구촌 전체가 온난화 현상에 시달리고, 국제 정세도 불안정해서 사람들이 온갖 일로 열받고 스트레스받는 화(火)의 기운이 가득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설상가상 화기(火氣) 가득한 매운맛을 즐겨 찾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불기운을 불기운으로 다스리는 이열치열의 역설을 활용해서라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작용하는 것일까.

선호하는 매운맛의 강도는 나라별로 천차만별이겠지만, 다른 나라에도 매운맛을 즐기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미국의 한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75%가 매운맛을 즐긴다. 또한 62%의 사람이 약간 짭짤한 음식에 일정 수준의 매운맛이 첨가된 음식을 좋아한다. 

우리 인류는 원래부터 단맛을 선호한다. 이는 영장류에게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다. 단맛이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단 음식을 먹으면 우리 몸의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된다. 인슐린은 혈액 속 당분을 세포로 끌어들여 그곳에서 열량, 즉 에너지원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 인류가 태곳적부터 잘 익어 단맛 나는 과일과 달콤한 벌꿀 등을 선호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인슐린의 이러한 작용에는 몸에 지방이 축적되게 하는 심각한 후유증이 있다는 것이다.

짠맛도 비슷하다. 몸의 대사가 원활해지려면 우선 수분 수송이 원활해야 한다. 그것을 돕는 것은 소금에 함유된 나트륨 이온의 역할이다. 오늘날과 달리 사냥과 채집 등으로 강도 높은 육체노동 끝에 땀으로 염분을 많이 소비해야 했던 우리 조상은 자연스레 짠맛을 선호하게끔 유전자에 각인이 된 것이다. 

오늘날과 달리, 원시시대에는 단맛을 내는 과일이나 벌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식용 소금 역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단맛이나 짠맛 나는 음식은 그것을 발견했을 때 가능한 한 많이 섭취해야만 했다. 음식 전문 컨설턴트인 이준 아이디어크루 대표에 의하면 맛집으로 소문난 집의 90%가 ‘단짠’ 즉 단맛과 짠맛이 기준 이상이라고 한다. 

오늘날 패스트푸드가 문제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패스트푸드에는 단맛, 짠맛, 지방이 너무 많다. 원시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그다지 귀하지도 않고, 많이 필요로 하지도 않은 설탕, 소금, 지방이 과도하게 들어 있다. 그것들이 사람의 입맛을 유혹하고 각종 성인병과 비만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 매운맛은 단맛이나 짠맛과는 달리 포유류가 즐기는 것이 아니다. 특히 고추 같은 매운 음식은 그것을 섭취한 이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포유동물 중에 매운맛을 즐기는 동물은 없다. 다만 새는 고추에서 매운맛을 담당하는 캡사이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새들이 고추 같은 매운 음식을 저항감 없이 섭취하게 해 그 씨를 널리 퍼뜨리려는 자연의 장치인 것 같다. 


고통 유발하는 매운맛 즐기며 쾌락 느껴 

고통을 유발하는 매운맛을 즐기는 종은 오직 인간뿐이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매운맛을 즐기는 것일까. 사람들이 고통을 유발하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서 쾌락을 느끼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마조히즘(masochism), 즉 정신적인 피학증(被虐症)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안부터 얼얼해지면서 열이 난다. 땀이 나기도 한다. 눈물도 난다.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진다. 이러한 부정적 신체 경험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는 도취감, 쾌락을 느낀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피학증이 아니냐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매운맛의 음식을 먹고 신체적인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육체적인 쾌락을 누리려는 것을 공포 영화 관람에 비유하는 이도 있다. 공포 영화를 볼 때 공포는 느끼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것은 마라톤 선수가 42.195㎞라고 하는 긴 거리를 오래 달리는 고통을 감수한 끝에 지극한 쾌감을 느끼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도 비슷하다. 마라톤 선수는 상식 선에서의 안전 범위를 살짝 벗어난 위험이나 고통을 감수한 뒤에 찾아오는 기쁨에 중독된다. 그 중독은 고통을 이긴 대가로 뇌의 보상중추에서 엔도르핀이라는 행복 호르몬에 의해 증폭된다. 

신경과학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계속해서 먹으면 캡사이신이나 그 유사한 물질이 일으키는 통증을 뇌에 전달하는 P라고 하는 신경전달물질을 고갈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천적으로는 매운맛에는 혐오감이나 거부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운맛을 견디고, 익숙해지며, 마침내 그것을 즐기는 면역 체계가 형성된다. 나처럼 장이 좋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런 면역 체계가 생길 것 같지 않지만 말이다.

고추 같은 매운맛을 내는 음식물에 들어 있는 캡사이신이 육체적 고통만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캡사이신에는 항산화 작용, 항염증 작용, 항균 작용, 진통 작용이 있다. 신진대사와 혈관 건강을 촉진시키는 효과도 있다. 칠레고추를 정기적으로 복용할 경우, 심장병이나 암으로 사망할 확률을 각각 26%, 23% 낮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는 성격 차이도 있다. 미국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좋아하고(76%), 자신을 매력적이라 생각하며(62%), 삶에 더 만족한다(65%)고 한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며(54%), 자신감이 있고(51%), 모험심이 있다(44%)고 생각한다. 

이처럼 매운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모험가 스타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스타일이 좋은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이들은 호기심이 많은 만큼 싫증도 잘 낸다. 모험심이 강하고 자기표현이 강한 만큼 이기적인 경우도 많아서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킬 확률도 높다. 

매운맛을 기피하는 사람들이나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신중하고, 사회적으로 친화력이 있으며,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 것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먹고 마시는 음식은 그 사람의 제2의 자아’라는 어떤 철학자의 말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명평론가이기도 했던 이어령 선생은 육식 위주의 미국인과 채식 위주의 한국인의 성격이 같을 수 없다고 했다. 고기를 잘게 잘라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 문화권과 통째로 칼로 썰어 먹는 문화권 사람의 성격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매운맛과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처럼 글로벌한 사회가 되기 전에는 외국인에게 절대로 대접해서는 안 될 음식 중에 1번이 된장찌개였다. 청국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요즘 TV를 보면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먹지 못하는 한국 음식이 거의 없다. K컬처의 영향으로 K푸드의 위상도 올라갔기 때문이기도 하고, 문화 상대주의 입장에서 타 문화에 대한 관용이 음식으로 확대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이 매운맛과 단맛을 선호하는 데도 선천적인 유전자 영향도 있을 것이다. 후천적인 문화나 학습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이치가 늘 그러하듯이, 음식 맛을 선호하는 과정에서도 적절한 수준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아 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외향과 내향, 호기심과 신중, 이기와 이타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중용적 조화가 이뤄진다면, 우리 사회는 개인 내적으로도 행복하고, 사회적으로도 화목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 인문예술 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