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욱 고은법률사무소 변호사 연세대 경영학·법학, 베이징대 법학 박사, 사법시험 43회, 사법연수원 33기, 전 법무법인 율촌 상하이 대표처 대표
허욱 고은법률사무소 변호사
연세대 경영학·법학, 베이징대 법학 박사, 사법시험 43회, 사법연수원 33기, 전 법무법인 율촌 상하이 대표처 대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각하’ 판단을 받았다. 주권국은 다른 나라에서 재판권이 면제된다는 국가면제이론의 인정 여부에 따라 2021년 초 내려졌던 결론과 상이한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이런 경우를 중국에서는 ‘동안부동판(同案不同判)’이라고 한다. 사안은 비슷한데 다른 판결이 내려졌다는 말이다. 반대로 유사한 사안에 대해서는 같은 판결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동안동판(同案同判)’이라고 한다.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통일된 법률 적용을 위한 유사 판결의 검색 강화에 관한 지도의견(시험실시)(最高人民法院關於統一法律適用加強類案檢索的指導意見(試行))’을 반포하고 작년 7월 31일부터 시행 중이다. 이 지도의견은 법률 적용을 통일해 사법의 공신력을 제고하고, 인민법원이 판결할 때 유사 판결(類案)에 관한 연구 검토를 통해 동안동판 이념을 실현하는 걸 목표로 한다.

지도의견에서 ‘유사 판결’이란 진행 중인 사건과 기본적인 사실 관계, 쟁점, 법률의 적용 문제 등에서 유사성이 있는 경우로 이미 법원 판결로 확정된 걸 말한다. 판결해야 하는 사건에 대해 명확한 재판 규칙이 수립돼 있지 않으면, 유사 판결을 검색하고 그 결과를 새로운 판결에 참조해야 한다. 검색해야 하는 대표적인 유사 판결에는 최고인민법원이 반포한 지도적 안례(指導性案例)가 있다. 2021년 2월 19일까지 최고인민법원은 27차례에 걸쳐 156회의 지도적 안례를 반포했다.

‘최고인민법원의 안례지도업무에 관한 규정(最高人民法院關於案例指導工作的規定)’은 하급 법원이 유사한 사안에 대해 판결할 때 지도적 안례를 참조하도록 해 지도적 안례에 일정한 구속력을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지도적 안례를 ‘판례’라 번역하지 않고 ‘안례’라 직역하는 건 중국 최고인민검찰원도 자체 기준에 따라 사건 처리의 일련의 리딩 케이스를 지도적 안례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반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례를 판례라고 번역하면 중국에서는 검찰도 판례를 만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중국 국민의 권리 의식이 높아지면서 소송 당사자가 유사한 판결을 검색한 뒤 법원에 자신의 주장이나 항변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제출하는 일이 늘고 있다. 지도의견은 이럴 때 지도적 안례를 제공하면 법원은 판결문에서 해당 지도적 안례의 법리를 참조했는지 여부에 관한 설명을 하도록 했다. 판결의 수용성을 제고하기 위한 조치다.

중국의 민사소송은 대등한 양 당사자가 주장을 입증하고 객관적인 제3자의 지위에 있는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것보다는, 공산당이 영도하는 중국적 특색의 사법체계하에서 공산당이 인민의 분쟁을 해결해준다는 시각이 강하다. 또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넓은 중국 땅덩어리 안에서도 인민들 간 정보 교환의 속도와 범위가 빠르고 넓어졌다. 유사한 사안에 관한 판결 결과가 심하게 다르면 사법 시스템과 공산당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이를 방지하려는 데에 동안동판의 가치가 존재한다. 또 동안동판은 중국 사법 절차에서 당사자의 지위가 높아지고 있음을 방증한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