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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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콩나물이 금값이다. 1만원 주고 살 게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웃 할머니들이 나눈 말이다. 이 간단한 대화 속에는 중앙은행 직원 못지않은 돈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력과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블랙핑크의 음악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그 가사의 발칙함뿐 아니라 예측하기 힘든 멜로디와 리듬의 변주를 느낄 수 있어야 하듯이, 이웃 할머니들의 직관적인 생활경제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상식과 무딘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이 짧은 대화가 담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를 확장해 보아야 한다.

“콩나물이 금값이다.” 이 은유적인 문장에서 ‘콩나물’은 콩(大豆)을 발아시켜 싹을 틔운 아삭한 식감의 식재료를 의미할 수도 있고, 코어(근원)인플레이션(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물가) 산정 대상에서 제외되는 농산물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소비재 일반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금값’이란 명동 금은방의 쇼윈도에 붙어 있거나 한국금거래소에서 고시하는 특정 귀금속의 가격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일상적 관용어로서 가치가 매우 높은 것 또는 매우 비싼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하간 ‘콩나물은 왜 금이 됐을까?’ 화폐를 중요시하지 않는 정통 경제학에서는 실물(콩나물)에 대한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을 가지고 상품의 가격 변화를 설명한다. 즉, 콩나물의 수요가 커지거나 공급이 줄어들면 콩나물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콩나물이 금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밀턴 프리드먼 같은 사람은 시중에 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콩나물이 금이 된다고 설명한다. 즉, 중앙은행이 돈을 너무 많이 풀어서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같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있는 물건이 줄어들기 때문에 돈은 돌이 되고 콩나물은 금이 된다는 것이다. 그 원리를 친절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동네 할머니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돈이 돌이 되면 콩나물은 금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일까?’ 그레고리 맨큐는 ‘돈(money)’이란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산(asset)’이라고 정의한다. 참고로 맨큐는 전 세계에서 경제학 교과서를 가장 많이 판 사람이다. 하지만 맨큐는 ‘자산’의 개념을 직접 정의하지 않고 ‘현금’ 등이라고 말하며 은근슬쩍 넘어간다. 폴 크루그먼, 벤 버냉키, 올리비에 블랑샤르 등 다른 유명한 경제학자도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남상오 교수의 ‘회계이론’을 찾아봤다. 그는 ‘자산’을 경제 주체가 소유한 금전, 권리, 동산, 부동산 등 재산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이렇듯 경제학자들은 ‘돈은 자산’이라고 말하고 있고, 회계학자는 ‘자산은 돈’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를 결합하더라도 ‘돈’에 대한 개념 정의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무한한 동어반복 또는 순환논법에 빠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식적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종교, 신화, 서사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프리드먼의 화폐적 서사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남태평양에는 ‘야프(Yap)’라는 작은 섬이 있다. 16세기 발견 당시 이곳에는 원시적 문명을 지닌 5000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다. 야프에는 금속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원주민은 돌을 깎아서 화폐를 만들었다. 돌화폐는 멧돌처럼 원기둥 모양이었는데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돌화폐 가운데 뚫린 구멍은 막대기를 집어넣어 운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돌화폐는 그곳에서 약 600㎞ 떨어진 섬에서 발견되는 석회암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모험을 좋아하는 원주민은 카누를 타고 멀리 떨어진 ‘석회암섬’으로 가서 돌화폐를 만든 후 이것을 다시 카누에 싣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야프 원주민은 애덤 스미스나 카를 마르크스를 만난 적도 없고 이들의 책을 읽어 본 적도 없었지만, 노동가치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들은 돌을 다듬고 운반하는 데 투입된 노동의 양, 즉 돌화폐의 크기에 따라 더 큰 가치를 부여했다. 이 돌화폐의 주인들은 우리들과 달리 점유나 등기를 통해 소유권을 공시하지 않는다. 운반하기 곤란할 정도로 큰 돌화폐를 거래한 경우, 새 주인은 자신이 새 주인임을 인정받는 데 만족해하면서 그 돌을 원래 주인의 앞마당에 그대로 남겨 둔다. 중요한 재산적 거래 행위에 대해 아무런 표식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는 앞마당에 돌화폐가 없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집 가족들도 돌화폐를 본 적이 없다. 그 돌화폐는 구전으로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 그 집안의 조상들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돌화폐를 만들어서 귀향하던 중 먼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 이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귀중한 돌화폐를 바다에 버려야 했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은 바다에 가라앉은 돌화폐가 매우 크고 값진 것이라고 증언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돌화폐가 정당한 형태로 공들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로 인해 생성된 가치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 돌은 주인집 앞마당에 실제로 놓여 있는 것처럼 화폐의 구매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외부 세계와 격리된 채 수백만 년을 평화롭게 지내던 야프 사람들에게도 극성스러운 제국주의자들이 찾아들었다. 1898년 빌헬름 2세가 다스리는 독일제국이 이 섬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독일 정부는 섬 지역 촌장들에게 자동차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새로운 도로를 개설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원주민은 숲속의 오솔길을 맨발로 한적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독일 정부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독일 정부는 마을 촌장들에게 명령불복종죄로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독일 관리들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지역을 찾아다니며 크고 무거운 돌화폐마다 독일제국의 상징인 ‘철십자’ 표시를 해놨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발생했다. 마을 사람들은 철십자 때문에 자신들이 비참하게 가난해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경제적 파탄에 빠진 원주민은 부족회의를 열고 독일 정부에 협력해 열심히 새 도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도로가 완성되자 독일 정부는 다시 관리를 파견해 돌화폐에 그려놓은 철십자 표시를 지우게 했다. 이로써 원주민은 소유권을 회복하고 이전의 부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됐다. 경제학의 거장 프리드먼의 명저 ‘화폐경제학(Money Mischief)’은 이렇게 야프의 돌화폐로부터 시작된다. 

제주 대정향교에 가면 의문당(疑問堂)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어린 학동들에게 ‘항상 의문을 품고 살라’는 의미에서 직접 현판을 써줬다고 한다. 지금도 유효한 지혜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현자를 기리는 마음에서 우리도 한번 이 시점에서 의문을 가져보도록 하자. ‘종잇조각에 불과한 우리의 지폐가 야프의 돌화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자적으로만 이체되는 우리의 예금이 구두로만 이전되는 야프의 돌화폐와 크게 다른 것일까?’ ‘야프에서 600㎞ 떨어진 석회암섬, 금본위제 시대의 금 채굴장, 관리통화 시대의 중앙은행은 무엇이 다를까?’ 20세기 가장 논쟁적인 법률가 카를 슈미트는 “적은 나의 형제다(Der Feind ist mein Bruder)”라는 역설적인 말을 남겼다. 적이 나의 형제라면, 돈은 돌의 형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