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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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증시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고급 와인 가격은 빠르게 치솟고 있다. 미국계 신생 와인펀드들이 젊은 개미 투자자 자금을 무기 삼아 고급 와인을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와인 관련 투자는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올해 하반기 들어서는 강(强)달러 영향으로 미국이 투자를 주도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올해 9월 기준 전 세계 금융 시장에서 거래되는 와인 거래 가격을 지수화한 ‘리벡스 파인 와인 1000’은 2021년 7월 30일 이후 1년 만에 24.4% 올랐다. 파인 와인 1000은 영국 런던 와인 거래소 ‘리벡스(LIVEX·London International Vintners Exchange)’가 산출하는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와인 관련 시장 지표다. 2004년 1월 와인 가격을 100으로 놓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거래하는 1000개 와인 현재 값을 비교해 지수화한다.

같은 기간 전 세계 증권 거래 시세를 재는 지표인 MSCI월드지수는 18% 내렸다. 미국 증시에서 우량주 중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 역시 16% 하락했다. 와인에 투자했다면 증시가 내리는 와중에도 20%대가 넘는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는 의미다. 기한을 5년으로 넓혀보면 파인 와인 1000 상승률은 47%다. 같은 기간 다이아몬드(15%), 금(33%) 같은 보편적인 대체 투자 수단이 거둔 수익률과 비교하면 와인의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달러에 미국계 와인펀드 급부상

고급 와인 몸값이 항상 지금처럼 높았던 것은 아니다. 와인펀드는 지난 30여 년간 단맛, 쓴맛을 모두 봤다. 1990년대 말 IT(정보기술) 붐이 일 무렵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프랑스산 샴페인’은 성공의 징표였다. 미국에서 IT 버블이 터지면서 고급 와인 수요가 주춤하자 중국이 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홍콩을 중심으로 고급 와인 거래가 폭증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가 닥치자 와인펀드는 침체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유럽 최고(最古) 와인펀드 ‘빈티지 와인펀드’는 한때 2000억원 규모에 이르는 자산을 운용했지만, 금융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2013년 청산됐다.

와인 투자 업계는 2016년을 기점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저(低)금리를 피해 대체 투자처를 찾던 미국 금융 투자 업계 눈에 와인이 들어오자 큰손들의 목돈이 몰렸다. 때마침 미국 요식 업계도 다시 기지개를 켜면서 고급 와인 소비 시장도 서서히 살아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와인 투자는 ‘부자들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와인펀드나 와인 관련 투자 상품 대부분이 소수 고액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사모펀드 방식이라, 수십억~수백억원대 목돈을 한 번에 넣을 수 있는 자산가들만 펀드 가입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젊은 개미들 투자금을 모아 굴리는 와인펀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와인 투자 업계 판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 미국에서 생긴 와인펀드 ‘비노베스트(VINOVEST)’는 창립 3년 만에 투자자 13만 명을 모았다. 이 펀드는 현재 투자 등급에 속하는 고급 와인 50만 병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유로화나 중국 위안화 대비 미국 달러 가치까지 급등하면서 고급 와인 투자 업계에서 미국의 입김이 더 세지는 추세다. 


와인 투자도 포트폴리오가 중요

주식형 펀드 매니저들이 미국 우량 기업을 기반으로 포트폴리오를 짜는 것처럼 와인펀드 운용사 대부분은 프랑스 유명 와인으로 투자 금액의 80%를 채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인 프랑스 보르도를 대표하는 5개 와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오브리옹은 와인펀드에서 전통적인 ‘대장주’다.

이들 와인은 연 생산량이 각각 20만 병을 넘어서는 대형 브랜드다. 물량이 넉넉해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거래되고, 수십 년 이상 보관해도 맛이 변하지 않아 대체 자산으로 가치가 높다. 시간이 지나 숙성될수록 입안에서 중후한 느낌을 주고, 병입 초기에는 느끼기 힘들었던 여러 가지 오묘한 맛과 풍미가 새로 생겨나는 경우도 잦다. 펀드의 나머지 20%를 놓고서는 미국 와인이 10%, 이탈리아 와인이 5%, 독일과 호주 같은 나머지 국가 와인이 5% 정도를 나눠 갖는다.

최근에는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보르도 지역 와인들과 상반된 특징이 있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와인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보르도가 월마트·코카콜라처럼 중심을 잡아주는 굴뚝주라면, 부르고뉴는 넷플릭스·페이스북 같은 신흥 우량주 개념이다. 명절 때마다 백화점에서 ‘국내 최고가 와인 선물 세트’로 꼽히는 로마네 콩티가 대표적인 부르고뉴 와인이다. 로마네 콩티는 한 해 생산량이 5000여 병에 불과하다. 이 희소성 때문에 한 병당 수천만원은 줘야 손에 넣을 수 있다.


국내서도 와인 투자 움직임 꿈틀

국내에는 아직 와인에만 투자할 수 있는 대체 투자 펀드가 없다. 기존 사모 방식 해외 와인펀드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해당 금융 당국 규정에 따라 자격이 인증된 전문 투자자의 자금만 받기 때문에 국내 개인 투자자들은 유명 해외 와인펀드에 끼어들 방법이 없다. 다만 비노베스트 같은 신생 펀드는 음주 가능 연령대 성인이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면 계정을 만들어 투자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조각 투자 플랫폼을 통한 고급 와인 투자가 점차 이름을 알리는 추세다. 트레져러, 피스 같은 대체 투자 플랫폼을 통해 1000원 미만 소액으로 로마네 콩티 같은 수천만원대 프랑스 고급 와인 소유권을 쪼개어 갖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NFT(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 토큰)를 이용한 와인 투자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국내 스타트업 블링커스가 운용하는 ‘뱅크 오브 와인’은 실물 주류에 대응하는 NFT를 한 병당 하나씩 교환권 형태로 발행해준다. 투자자는 이 교환권으로 마켓플레이스에서 수익을 실현할 수도, 제휴 매장에서 실물 와인으로 바꿀 수도 있다. 

조금 더 적극적인 국내 일반 투자자들은 펀드 대신 경매를 통해 수백 병 단위로 와인을 사들인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같은 세계적인 경매사들은 뉴욕·파리·런던·홍콩 같은 주요 와인 거래 거점에서 수시로 와인 경매를 주관한다. 주로 와인 소유자가 죽거나(die), 이혼하거나(divorce), 빚(debt)이 생겼을 때 좋은 매물이 한꺼번에 나온다고 해서 와인 경매사들은 ‘와인 경매에서 성공하려면 3D를 노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관계자는 “원자재나 금 같은 다른 대체 투자가 주식과 상당 부분 맞물려 움직이는 반면 와인은 상관관계가 적다는 이점이 있어 요즘처럼 전 세계적으로 자산 변동성이 출렁일 때 특히 가치 있는 자산”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