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월 16일(현지시각)미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월 16일(현지시각)미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미국 혁명 이후 탄생한 미국 의회는 매우 고상한 곳이었다. 의회를 탄생시킨 계급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들이 활동하는 세상에서 정치 지도자는 항상 더 나은 출신이어야 했다. 지도자들은 몽테스키외가 말하는 공동의 선(善)에 헌신하며, 무사무욕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은 밥벌이에 급급한 평범한 사람들이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가 만들어낸 의회의 작동 원리는 ‘공개적 토론’이었다. 토론은 주장과 반대주장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제3의 결론에 이르는 변증법적 기술이다. 이때 변증은 대화를 통한 결론의 도출을 의미한다. 초창기 의회의 의사결정 절차는 법정에서 행하는 소송과 유사했다. 토론은 이성적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 토론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상대방의 주장이 보다 합리적이면 자신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매우 비인간적이고 고통스러운 기술이었다. 

코로나19와 경기침체가 극성을 부리던 2021년 1월 취임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930년대 대공황과 싸우던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그의 뉴딜정책을 연상시키는 ‘더 나은 재건 계획(Build Back Better Plan)’을 국정과제로 제안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첫째 코로나19 구제 계획(현금 지급, 실업수당, 백신 지원 등)인 미국구조계획(American Rescue Plan), 둘째 기후변화 대응과 인프라 투자(교통, 주택, 에너지) 계획인 미국고용계획(American Jobs Plan), 셋째 사회정책 도입(무상교육, 유급휴가, 의료보험 등)을 위한 미국가족계획(American Families Plan)의 세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이처럼 대통령이 원대한 국정과제를 제시하더라도 그 과제의 실행을 위해서는 법률과 예산이 뒷받침돼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 최고 권력인 주권은 국민이 소유하되(국민주권 원리), 국민은 생업에 바쁘기 때문에 주권에서 파생되는 구체적인 통치권을 자신의 대리인(대의제 원리)인 국회, 대통령, 법원에 위임한다(권력분립 원리). 국가의 모든 통치권은 최고 법인 헌법에 근거해야 하며(입헌주의), 통치권의 행사를 위해 국회가 법률을 제정하면(의회주의) 대통령이 법률에 따라 행정공무원들을 움직여서 집행권을 행사하고(법치주의), 법률의 집행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법원이 법률의 해석을 통해 분쟁을 해결한다. 또한 미국은 양원제 국가이기 때문에 법률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원과 상원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현재 미국은 민주당이 행정부(대통령)와 하원(435석 중 220석)에서 우세하지만, 상원(100석 중 48석)과 대법원(9명 중 3인)에서 밀리고 있다. 

2021년 9월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은 대통령의 국정 계획을 반영한 ‘더 나은 재건법(Bulid Back Better Act)’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상원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3개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 미 상원은 공화당 50석, 민주당 48석, 무소속 2석의 의석 분포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이 과반수(51명) 찬성을 얻으려면 무소속 2명 이외에 공화당 1명이 더 필요했고, 둘째 이 법안을 ‘일반법안’으로 제안할 경우 공화당 의원들의 의사진행방해(filibuster)를 피할 도리가 없으며, 셋째 이 법안을 ‘더 나은 재건법’이라는 명칭으로 통과시킬 경우 2022년 11월에 실시되는 중간선거에서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민주당 지도부는 법안의 명칭을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감축법’으로 변경하고, 야당의 의사진행방해가 불가능한 신속처리법안, 즉 ‘예산법안’으로 바꿔 상정했다. 그리고 상원에서 무소속 의원 2명의 찬성표를 얻어내어 공화당과 50 대 50 동률을 기록한 뒤, 미국 헌법 제1조 제3항 제4호를 이용해 상원의장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민주당)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함으로써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2년 8월 16일 바이든 대통령(민주당)이 양원을 통과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함으로써 법안은 법률로 확정되고 효력을 발생하게 됐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총 7400억달러(약 1011조원) 규모의 미국 정부 예산안을 담고 있는데, 첫 번째 4400억달러(약 601조4800억원) 규모의 신규정책 집행과 둘째 3000억달러(약 410조1000억원)의 재정적자 감축이 그 내용이다. 첫 번째 사업계획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후변화 대응 차원에서 친환경에너지 발전,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 등에 3750억달러(약 512조6200억원)를 지출할 예정이고, 의료보험 개선 차원에서 노인 의료보험 부담금의 상한 설정, 코로나19 의료보조금 지급연장 등에 640억달러(약 87조4800억원)를 지원할 예정이며, 신규사업의 재원마련을 위해 15% 최저 법인세(연간 수익 10억달러 이상 기업) 도입, 기업의 자사주 매입 시 1%의 세금 부과 등을 추가로 실시할 예정이다. 

다만, 전기차 구매 시 세액공제 대상에서 중국산 핵심 광물과 배터리를 사용한 전기차를 혜택 대상에서 빼고, 미국에서 생산된 배터리와 핵심 광물을 사용한 전기차만 혜택을 주기로 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생산되고 미국에서 판매 중인 한국산 전기차에 불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법이 제정된 후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환경단체들은 “석탄 남작(coal baron)과 민주당 지도부 간의 밀실 거래로 최전선 커뮤니티의 의견이 묵살됐다”며 분노하고 있고, 자전거단체들은 “전기자전거가 배제됐다”며 불평하고 있다. 특히 경제예측 전문기관인 PWBM(Penn Wharton Budget Model) 등은 이 법률이 재정적자 해소와 탄소배출량 감축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인플레이션 감축에 대해서는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법률의 이름을 ‘재정적자 해소법’이나 ‘탄소배출 감소법’이 아닌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라고 지었을까? 

현재 미국인에게 가장 시급한 걱정거리는 탄소배출로 인한 환경오염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소득 감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정치 환경에서는 법안을 잘 포장해야 공청회와 언론 보도에 유리하고 지지자들을 용이하게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치인들은 법안을 브랜드화하고, 단일한 상품 개념과 입법을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내 야당으로 통하는 조 맨친 상원의원은 “인플레이션이 최우선 순위가 돼야 하며, 인플레이션을 화나게 하는 법안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서 그의 말은 일종의 티저, 즉,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수단이다. 더러운 쓰레기장 앞에 ‘쓰레기장을 아름답게 꾸며주세요. 오늘은 사랑스러운 물건을 버려주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고 치자.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제목은 중립적 매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제목은 사람들을 문지르고, 마사지하고, 척추지압사처럼 거칠게 다룬다. 현대 사회가 미디어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결국 그 제목이 의도하는 충격이다. 미디어가 티저인 세상에서, 중앙은행이 의중 떠보기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잡아보려 하듯이, 의회는 작명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하는 것이다. 법(法)이 미디어면, 법(法)은 마사지이고, 결국 법(法)은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어(기대에 영향을 미쳐) 인플레이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