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중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미국 뉴욕대 로스쿨, 사법시험 28회, 사법연수원 18기, 현 법무법인 태평양 IP그룹장, 전 삼성전자 IP법무팀장 부사장, 전 특허법원 판사
강기중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미국 뉴욕대 로스쿨, 사법시험 28회, 사법연수원 18기, 현 법무법인 태평양 IP그룹장, 전 삼성전자 IP법무팀장 부사장, 전 특허법원 판사

미국은 전 세계에서 특허소송이 가장 많이 발생하고, 손해배상 액수도 가장 큰 국가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배심원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

미국의 특허소송은 배심원이 특허 무효 여부, 특허 침해 여부, 손해배상 액수 등의 핵심적인 쟁점을 결정하는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한 재판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특허소송을 수행하게 되는 경우, 배심원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네 가지 포인트로 정리했다.


포인트 1│
배심원의 손해배상액 결정 근거는 비공개

유명 중앙처리장치(CPU) 개발·제조 업체인 I사는 2019년에 이른바 ‘특허 괴물(patent troll)’로 불리는 미국의 ‘VLSI테크놀로지’로부터 여러 건의 특허침해 소송을 당해, 올해 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미국 특허소송의 중심지로 새로 주목받고 있는 텍사스주의 와코(Waco)라는 소도시에 위치한 텍사스 서부연방지방법원은 3월 2일 첫 번째 소송에서는 I사가 VLSI에 총 21억7000만달러(약 2조4521억원)를 손해배상하라는 배심원 평결을 내렸다. 이후 4월 21일 두 번째 소송에서는 I사가 VLSI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으므로 VLSI에 한 푼도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배심원 평결을 내렸다.

미국 배심원들은 금액이 아무리 커도 손해배상 액수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대외적으로 서명해서 공표하는 배심원 평결문에는 최종적으로 결정한 금액 또는 로열티 비율만이 기재된다. 그러한 숫자가 도출된 근거나 증거는 밝히지 않는다. 실제 I사 사건의 경우도 첫 번째 배심원 평결문에는 손해배상액만 기재돼 있었을 뿐, 그 이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배심원 평결 이후 일부 배심원들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들이 계산한 근거를 밝히는 경우가 드물게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심원 평결문에 기재되지 않은 사항이므로 법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송 당사자들로서는 역분석(reverse engineering)을 통해 배심원 평결문의 액수를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가 일반인의 상식에 따른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나름 수긍할 만한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배심원들이 복잡한 기술과 손해배상 관련 쟁점이 있는 사건에서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전혀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특허소송 피고들은 대부분 매출 규모가 큰 회사들이라는 점 등은 배심원이 큰 부담 없이 수조원대의 금액을 손해배상액으로 인정하는 결단을 내리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미국의 특허소송은 배심원이 특허 무효 여부, 특허 침해 여부, 손해배상 액수 등의 핵심적인 쟁점을 결정하는 지구상 거의 유일한 재판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국내 기업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미국의 특허소송은 배심원이 특허 무효 여부, 특허 침해 여부, 손해배상 액수 등의 핵심적인 쟁점을 결정하는 지구상 거의 유일한 재판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국내 기업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포인트 2│
기술 관련 증거를 제대로 살피는지 의문시

배심원들이 아무런 증거를 검토하지 않고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 특허소송에서 배심원들은 법정에서의 증거 조사가 끝난 후 4~5시간 만에 특허 무효 여부, 특허 침해 여부, 손해배상 액수 등에 대한 평결을 내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를 고려하면 특허소송에서 수십억원을 써 가면서 변호사들과 관련 전문가들이 수십만 쪽 이상의 증거들을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서 증거로 제출한 것들을 제대로 살펴봤다고 하기는 어렵다. 며칠간 법정에서 변호사들과 증인, 전문가 증인들을 통해 보고 들은 것에 기대 다소 감성적인 결론을 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사자들로서는 배심원 재판 절차가 진행되는 법정에서 주어진 시간에 어떻게든 배심원들을 설득해야만 승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배심원 재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법정에서 행해지는 담당 변호사들의 설득력 있는 변론이나 핵심적인 증인, 특히 기술 전문가 및 손해배상 전문가의 증언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배심원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제일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법률과 기술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특허소송을 처음 접해보는 배심원들로서는 본인들이 알 수 없는 영역의 사항을 기술적, 논리적으로 타당한지를 독자적으로 협의해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 변호사나 증인, 특히 어느 전문가들이 더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을 먼저 하고 나서, 해당 전문가들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포인트 3│
배심원에 대한 감성적인 기법 동원 필요

실제 배심원 재판 법정에서는 배심원들로부터 인간적인 신뢰를 얻기 위한 다양한 감성적인 기법이 동원된다. 필자가 직접 방청한 한 재판에서는 변호사와 증인이 소송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항, 예를 들면 본인들의 성장 이력, 졸업한 학교, 가족관계, 반려견 이야기, 다니고 있는 지역 교회, 좋아하는 지역 스포츠팀 등과 같은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특히 복잡한 특허 법리와 기술 내용, 손해배상 관련 쟁점들을 배심원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특허소송임에도 불구하고, 통상 원고와 피고에게 각각 10~15시간의 재판 시간만이 주어지는 배심재판에서는 시간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도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배심원들과 교감하고 친근감을 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에 따라 배심원의 심리 상태, 설득 방법, 모의재판을 전문적으로 컨설팅하는 업체도 자주 활용된다. 손해배상 액수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사건에서는 사전에 모의배심재판(mock jury trial)을 하기도 한다.


포인트 4│
지역에 따라 다른 배심원의 성향 파악해야

특히 미국은 지역에 따라 배심원들의 성향이 다를 수 있다. 모의배심재판을 통해서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잠재적인 배심원들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결정할지를 탐색해서 실제 재판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심원의 2~3배 인원으로 세 그룹 정도로 배심원을 구성해서 이뤄지는 모의배심재판에서는 원고와 피고들의 주장 요지를 들으면서 어떤 부분의 주장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지를 수치로 평가하게 한다. 이어 그룹별로 자유롭게 배심원 평결을 위해 협의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변호사들과 회사의 사내 변호사 등은 거울방과 같은 곳에서 모의배심원들의 협의 과정을 몰래 관찰한다. 필자가 모의배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협의하면서 손해배상액을 결정하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니, 모의배심원들은 수천억원이 걸려 있는 재판에서, 0원부터 수천억원까지의 범위에서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금액을 결정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마치 1970년대 한국 반상회에서 동네 주민의 논의 과정을 연상시키게 했다. 금액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특허의 가치 자체를 평가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이익을 많이 내느냐를 보거나, 특허를 침해당한 특허권자가 원래 돈을 많이 버는 회사니까 손해배상이 필요 없다는 등 실제 손해배상액 산정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요인들 위주로 이야기가 오갔다. 특히 누군가가 주도적으로 토론을 이끌 경우에 그에게 기울어져서 결론이 나기도 했다. 또한 손해액을 결정하는 데는 양 당사자가 주장하는 금액의 중간 지점에서 출발하는 방식도 자주 사용됐다. 중간에서 출발한 저울추가 어디로 기울지는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미국 특허권자의 특허를 침해하는 것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는 한국 기업이라면 배심원 리스크를 고려해서 특허 분쟁 대응 전략을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특히 미국 특허소송에서 배심원들이 특허를 무효로 하는 데 인색하다는 경향까지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