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카이스트(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편집장
김우창 카이스트(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편집장

평소 본 칼럼 시리즈를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사과를 드리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필자는 그간 본 칼럼을 통해 암호화폐를 여러 차례 비판한 바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2017년 말 비트코인 가격이 당시 전고점인 2만달러(약 2200만원)에 육박했을 때 과거 튤립 버블에 비견할 만한 비이성의 극치라 믿었다. 당시 법무부의 수장이던 박상기 장관이 암호화폐 거래소 폐쇄안을 포함한 아주 강경한 대처 의지를 표현했던 소위 ‘박상기의 난’ 이후 암호화폐 가격이 폭락했을 때 정상을 되찾아가는 것이라 생각했고, 앞으로 다시는 비트코인이 2만달러를 찍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구 밖에서 처음으로 일어날 금전 거래는 달러화나 유로화보다는 암호화폐일 가능성이 더 커진 작금의 현실에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필자가 틀렸다. 충분한 인사이트가 없었던 글, 독자분들께 사과드린다.

달러화 패권을 제치고 세계를 지배할 것과 같은 암호화폐의 열기를 전혀 예측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암호화폐가 왜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는지는 알려드리려고 한다. 그래야 독자분들께 드리는 사과가 진정성이 있을 테니까.

블록체인, 정확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퍼블릭 블록체인의 핵심 작동 원리 중 하나는 블록체인 생태계의 인센티브 구조가 개별 참여자들이 블록체인의 위변조가 일어나지 않는 무결성(데이터의 정확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데이터의 결손과 부정합이 없음을 보증하는 것)을 위해 선의(善意)의 행동을 하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모든 참여자가 거래 기록을 담고 있는, 분산된 거래 장부인 원장을 각자 보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이 원장은 보이지 않는 체인으로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원장들과 비교된다. 만약 특정 참여자가 자신이 들고 있는 원장을 위·변조했다고 하자. 이 경우 전체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어떤 원장이 정답인지 선택할 필요가 있다. 비트코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블록체인은 이를 다수결의 원칙으로 해결한다. 즉 51% 이상의 노드(블록체인 네트워크의 참여자)가 손을 들어주는 원장이 정상 원장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위·변조를 시도하는 사람이 노드의 51% 이상을 소유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블록체인 참여자가 합리적인 의사 결정자로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 한다면 선의의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답임을 의미한다. 위·변조하려는 행위, 혹은 위·변조에 동조하는 행위는 공짜가 아니다. 이를 원한다면 블록체인 네트워크 내에서 컴퓨팅 자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다수가 아님을 뻔히 아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어진다. 어차피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내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테고, 따라서 이는 돈을 허공에 날리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참여자가 51% 이상의 노드를 소유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수결의 원칙하에서 이 참여자는 해당 블록체인 네트워크 내에서 신과 같은 권능을 갖게 된다. 원하는 대로 모든 거래 기록을 변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블록체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다수의 사용자가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누구도 51%의 노드를 갖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51% 공격’이 의미를 갖게 된다. 담합 혹은 해킹 등의 불법적인 방법으로 51%의 노드를 실제로 장악하는 사용자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거래를 조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51% 공격이라 부른다. 블록체인의 묘미는 충분히 성숙한 블록체인의 경우 이러한 시도 역시 참여자가 자발적으로 시도하지 않도록 디자인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 블록체인 네트워크상에서 51% 이상의 노드를 소유하는 집단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은 비록 해당 블록체인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점에서 비트코인 가격은 폭락할 것이다. 비트코인의 가치는 해당 블록체인의 무결성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51%의 노드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을 텐데, 이들이 나서서 자발적으로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할 리 없다. 즉,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개별 사용자는 자신, 혹은 자신이 포함된 집단의 지분이 과반을 넘지 않는 것이 최적이다. 따라서 전체 네트워크상에서는 51% 이상의 노드를 장악한 사용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 내시균형(Nash Equilibrium)이다.


비트코인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국내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비트코인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국내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게임이론을 통한 수학적 증명으로 보는 암호화폐

네트워크 ‘내부’에서 참여자의 행위를 조절하는 블록체인의 디자인은 게임이론 관점에서는 완벽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 게임에 네트워크 ‘외부’ 사람을 참여시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암호화폐는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중앙화한 권한이 필요하고, 군사력 등의 물리적인 권한만큼 중요한 것이 통화발행권이다. 이것 없이는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에 필수적인 통화 정책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화위조죄가 엄청난 중죄인 것은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인 통화발행권을 위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는 ‘화폐’라 이름 지어졌고, 또 화폐로 작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국가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암호화폐가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게임이론을 블록체인 생태계 내부 참여자들 외에도 각국 정부를 포함해 적용해보자. 정부는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것이 존재 이유를 소명하는 행위다. 이는 기존의 통화와 암호화폐가 교환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정책적 수단을 통해 간단히 달성할 수 있다. 게다가 현재 사회의 경제적 헤게모니는 각국 정부가 가지고 있다. 따라서 충분히 합리적인 사람들은 암호화폐를 기꺼이 기존 통화를 주고 사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 힘들게 번 기존 통화를 날리는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시균형은 암호화폐가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고 사라지거나,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에서 유지되는 지점에서 달성되어야만 한다.

필자의 암호화폐에 대해 비판적 시각은 게임이론을 통한 수학적 증명이 기반이다. 만약 게임이론이 실제로 작동한다면 암호화폐가 주류 세상에 편입될 수 없다. 반대로 게임이론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암호화폐는 무결하지 않다.

다만 필자가 간과했던 부분이 하나 있다. 정부는 단일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때 유력한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한 여당 중진의원이 암호화폐 규제를 시사하는 행정부를 비판하면서 암호화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진정 본인이 정부와 운명을 같이한다면 국가의 통화발행권을 위협하는 암호화폐를 옹호하면 안 된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는 국가의 통화발행권보다 본인의 정치적 생명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

필자는 여전히 암호화폐가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는 것이 내시균형이고, 따라서 장기적으로 암호화폐의 가치는 대부분 상실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리 될 거다”라는 주장처럼 의미 없는 것도 없다. 결국 암호화폐의 미래는 정부의 유력 인사들이 개인의 성취와 국가의 통화발행권 중 어떤 것을 우선시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최근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여당 정치인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택한 듯하고, 2030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는 어떤 행위라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소한 국내에서는 암호화폐의 생명력은 한참 더 유지된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어차피 그들에게 50년, 100년 뒤의 국가는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