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인류의 유일한 희망’ 백신이 등장하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고통도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긴 터널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각국의 백신 수급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백신 국수주의’ ‘백신 이기주의’ 등의 씁쓸한 용어가 등장했고, 백신 접종에 나선 국가에서는 부작용 논란이 끊임없이 나온다. 유럽은 신약 개발의 역사에서만큼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미국이 주도한 백신 개발·보급의 과정에서는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회원국 간 조직력도 부실했다. 유럽은 코로나19 재유행을 또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필자는 유럽연합(EU)이 코로나19 백신 부족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동시에 백신 접종 대기자와 백신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기저질환 환자 보호에도 힘써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EU 집행위원회와 회원국이 합의해 유럽보건비상준비대응국(HERA)의 빠른 의사 결정과 충분한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셸 골드먼(Michel Goldman) 벨기에 브뤼셀 자유대 면역학 명예교수, 전 혁신의약기구(IMI) 총재
미셸 골드먼(Michel Goldman)
벨기에 브뤼셀 자유대 면역학 명예교수, 전 혁신의약기구(IMI) 총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고, 유럽연합(EU)의 느린 백신 보급은 그 고통의 시간을 늘리고 있다. 이른 시일 내에 각국 지도자가 강력한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코로나19 사태는 유럽에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피해를 야기할 것이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럽을 강타한 뒤 EU 회원국들은 백신 보급 계획에 만족할 수 없었다. 각국 정부는 백신 보급을 EU 집행위원회에 맡겼지만, 집행위원회는 백신 생산 계획과 유통 계획을 조화롭게 짜지 못했다. 또 백신 접종 우선권을 어느 집단에 줄지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했다. 최근에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한 사람 일부에서 ① 혈전(血栓·피가 굳어서 생기는 덩어리)이 보고돼 13개 유럽 국가가 해당 백신 접종을 중단하기도 했다.

유럽의약품청(EMA)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했지만 모두를 안심시키는 데 실패했다. 몇몇 EU 국가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을 재개했지만, 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 등은 여전히 백신 접종을 멈춘 상태다. 프랑스는 55세 이상 국민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을 제한하도록 했다. 계속되는 불협화음은 아스트라제네카뿐 아니라 코로나19 백신 전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장 앞으로 몇 주 동안 EU의 최우선 과제는 백신 부족 해결이어야 한다. EU 회원국들은 마음을 모으는 데 실패했고, 일부 회원국은 EU 밖에서 백신 물량을 구하고 있다. 헝가리는 러시아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이미 접종 중이고, 수십만 명 분량의 중국 시노팜 백신을 구매했다. 슬로바키아도 러시아산 백신을 사들였다. 체코 역시 러시아산 백신 수입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최근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는 새로운 백신 생산을 위해 이스라엘과 협약을 했다고 발표했다. 이 협약은 백신 연구개발(R&D)을 위한 공동 기금 설립, EU 프로그램 외의 정기적 임상시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동시에 유럽은 백신 접종 대기자와 특별한 기저질환 때문에 백신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 미국에선 ② 단클론 항체(monoclonal antibody)가 이런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프랑스·독일·이탈리아는 EMA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단클론 항체 치료제 연구를 승인했다. 백신 국수주의처럼 ‘항체 국수주의’도 얼마든지 전 세계에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한 EU 집행위원회는 향후 몇 개월 동안 코로나19 백신 공급을 관리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설립했다. 티에리 브레튼 EU 내부시장담당 집행위원이 이끄는 이 TF는 올해 여름이 끝날 때까지 유럽 성인의 70%가 면역력을 갖게 한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우고, 유럽 내 가용한 모든 생산력을 동원하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한 의료진이 2월 7일(현지시각)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프랑스 파리의 한 의료진이 2월 7일(현지시각)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이와 함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올해 2월 ③ ‘유럽보건비상준비대응국(HERA) 인큐베이터’라는 이름의 코로나19 바이러스 변이 대응 계획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HERA는 아스트라제네카·모더나·존슨앤드존슨 백신이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개발되는 데 이바지한 미국 보건성 산하 생의학연구개발청(BARDA)과 유사한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은 BARDA 덕분에 유럽보다 훨씬 빨리 백신 공급에 착수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위한 미국 정부의 엄청난 노력은 120억달러(약 13조4100억원) 이상의 전용 예산뿐 아니라 기초연구부터 대규모 생산·유통에 이르는 백신 공급망 전반을 통합한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 전략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모두에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겼다. 백신 전문가인 제약사 고위 임원과 백신 유통을 책임지는 고위 군 관계자 중심의 지배구조를 짠 것도 미국의 빠른 백신 보급 전략에 유효했다.

EU의 계획이 미국에서와 같은 성공을 유럽에서도 재현하는 데 있다면, 미국처럼 충분한 재정을 동원하는 게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일은 각국과 집행위원회가 HERA의 빠른 의사 결정과 충분한 자율권을 보장하는 데 합의하는 것이다. 유럽혁신위원회(EIC)는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참고 모델이 될 수 있다. EIC가 유럽투자은행(EIB)과 함께 차세대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는 ④ ‘큐어백(CureVac)’에 대한 영향력을 투자자로서 유지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어떤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든지 간에 유럽 지도자들은 코로나19 백신 보급을 더 서둘러야 한다. 또 그들은 유럽의 제약·바이오 혁신에 도움이 될 만한 야심 찬 전략도 새롭게 수립해야 할 것이다.


Tip

올해 3월 유럽의약품청(EMA)은 혈전의 전체적인 위험 증가와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가 4월 들어 연관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백신이 주는 이익이 부작용보다 크다는 입장은 유지했다. 영국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아동 임상시험을 일시 중단했다. 분위기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백신 접종 강행 의지를 내비쳐온 한국 정부는 4월 8일로 예정했던 특수학교 종사자와 유치원, 초·중·고교 대상 백신 접종을 일시 연기했다.

기본적으로 항체는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침입할 때 활용하는 스파이크(돌기) 단백질에 달라붙어 감염력을 떨어뜨린다. 단클론 항체는 바이러스의 특정 항원에만 결합하도록 분리해낸 항체다. 이미 에볼라·암 등의 질환 치료에 활용돼 왔다. 지난해 10월 코로나19에 감염됐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단클론 항체 치료제를 투약한 후 회복했다. 당시 트럼프는 “상태가 곧바로 좋아졌다. 믿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라고 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유럽보건비상준비대응국(HERA) 인큐베이터’ 계획을 통해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개량 백신 개발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다. 전 세계 연구자와 생명공학 회사, 제조 시설 등이 EU와 협업한다. EU 집행위원회는 변이 확인에 특화된 진단 방법을 개발하고 EU 회원국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데 최소 7500만유로(약 1000억원)를 지원하고, 변이 연구와 관련 정보 교환에 1억5000만유로(약 2000억원)를 투자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2000년 설립된 큐어백은 독일 제약·바이오 기업이다. 큐어백은 백신 사용 시 최대 걸림돌의 하나로 지적돼 온 냉동 보관 문제 극복에 필요한 신기술을 개발 중이다. 유럽혁신위원회(EIC)에 따르면, 유럽투자은행(EIB)은 큐어백과 7500만유로(약 998억원) 지원 계약을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