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사진 셔터스톡
엘리자베스 2세. 사진 셔터스톡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생전의 다양한 모습이 재조명을 받았다. 그는 1952년부터 70년을 왕위에 재임해 플래티넘 주빌리를 경험한 역사상 두 번째 왕이었다. 영국만 아니라 16개국이 소속된 영연방의 왕이었으며 심지어 피지의 최고 추장이었다. 정치적으로 직접 다스리지 않는 국가 원수라는 직책이었지만 2개국 이상의 국가 원수로 현존하는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의 직책 중 여느 지도자와 다른 특이한 역할은 영국의 최고 종교 지도자라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수장이기도 했다. 영국 국왕이 종교계의 최고 지도자를 겸한 것은 헨리 8세부터다. 헨리 8세는 당시 왕비와 이혼하고 왕비의 상궁이던 앤 불린을 새 왕비로 맞으려 했다. 교황청의 이혼 허락을 받기가 어려워지자 교황청에서 독립해 영국 국교회를 설립했다. 1534년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발표했다. 이후 영국 왕은 영국 국교회의 최고지도자를 겸하게 됐다. 

중세 시대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은 서유럽에서 교황의 위세가 꺾이고 왕국의 힘이 강해지는 근대가 열리던 시기였기에 가능했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 개혁 의제를 써 붙인 것이 1517년이니 이미 종교개혁의 기운이 유럽 대륙을 휩쓸기 시작했던 때였다. 루터는 1520년 초부터 성직자들이 독점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보급했고 영국에서는 틴데일이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개신교 개혁바람이 영국 국교회의 출범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영국 국교회는 처음에는 수장만 왕으로 바꿨을 뿐 구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에게 왕관을 얹어주는 캔터베리 대주교를 영국 왕이 직접 임명하고 교회는 왕의 지배하에 놓였다. 의회는 이런 변화가 진행될 수 있도록 법질서도 정비해 주었다. 한 왕국 안에서 종교는 하나여야 했고 군주가 선택한 종교가 국교가 됐기 때문에 모든 영국 국민이 하루아침에 국교회 신자가 돼야 했다. 그러나 구교도 아니고 신교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의 국교회는 신실한 구교와 개신교 신자들로부터 저항에 부딪혔다. 국교회 출범 초기에는 가톨릭 수도원을 폐쇄하고 교황청을 무시하는 헨리 8세에게 순복하지 않은 가톨릭교도가 처형당했다. 

헨리 8세 사후 왕이 바뀔 때마다 영국 국교회는 구교로의 회귀와 국교회의 복귀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개혁가들은 종교가 일상을 좌우하던 시대에 군주 한 사람이 국민의 종교를 좌우하는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왕권을 인정하고 존중하되 신앙을 위협하는 지배자에게는 무력을 써서라도 저항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런 인식은 후에 청교도 혁명으로 나타나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극단적인 사회적 변화를 초래했다. 공화정의 지도자이던 올리버 크롬웰이 5년 만에 사망하면서 왕정이 복구됐고 국교회도 정비됐다. 개신교적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해 프로테스탄트적 기반이 국교회의 확고한 신앙적 기반이 됐고 왕이 교회의 수장을 맡는 성공회가 이때 확립됐다. 헨리 8세의 수장령 이후 150여 년 만이다. 

성공회는 이후 영국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초가 됐다. 다수 국민이 공통된 가치관과 지향성을 가지는 계기를 만들었고 정치지도자들이 신앙적 기초위에서 정책 방향을 점검하도록 이끌었다. 영국은 선진국 중 가장 먼저 노예제 폐지를 법제화했고 초기 자본주의가 발전하던 시기에도 유럽 대륙과 달리 노동자들의 복지를 함께 고려해 마르크스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인의 정신적 기반이 된 국교회의 수장으로서 일생 겸손하고 신실하게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해 영국 사회 단합과 윤리적 고양에 기여한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영국인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이끌어온 여왕으로 마지막까지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질문이 생겼다. 한국 사회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누구인지, 있기는 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