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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욱 아산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서울대 법대, 국방대 국방관리대학원 석·박사, 현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겸임교수, 육사 군사사학과 외래교수, 3사 초빙교수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서울대 법대, 국방대 국방관리대학원 석·박사, 현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겸임교수, 육사 군사사학과 외래교수, 3사 초빙교수

최근 한·미 동맹이 다시 강화되고 있다. 한·미 양국은 북한과 공산주의 위협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냉전 기간 내내 싸워왔다. 한·미 동맹은 한국전쟁으로 태어나고, 베트남전쟁으로 혈맹으로 다져졌으며, 북한의 복합 도발 속에도 동북아의 평화를 지켜왔다. 그리하여 내년이면 한·미 동맹이 드디어 70년주을 맞이하게 된다.


비대칭 동맹의 파탄 위기

미국은 애초에 일본 식민지였던 최빈국인 대한민국을 믿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전차나 전투기 한 대도 지원하지 않은 채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인 애치슨라인에서 대한민국을 제외시켜 버렸다. 물론 이것이 한국을 버렸다는 뜻까지는 아니었지만 북한은 그렇게 읽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작전통제권을 유엔(UN)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맡기는 초강수를 두면서 미국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종전이 다가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 석방과 정전 회담 불참 등 정치적 초강수로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면서 한·미 동맹을 만들었다.

동맹 초기에 최빈국 수준의 대한민국은 모든 것을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기대는 크지 않았으나 냉전의 최일선으로 공산권의 확대를 막고 아시아의 허브인 일본을 지켜내는 전초 기지로서 역할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한국이 산업화를 거쳐 발전을 시도하는 사이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주한 미군 7사단 철수를 고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격적인 월남 파병 결정으로 미군 철수를 막았다. 또한 브라운 각서로 엄청난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까지 약속받았다.

베트남전쟁으로 한·미 방어 태세의 약화를 기대했던 북한은 1968년부터 1·21 청와대 기습이나 울진·삼척 공비 침투, 푸에블로호 납북 등 전방위로 한국을 공격했다. 이에 대응하여 양국 국방장관이 국방 협력을 위해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한·미의 분열이 시작된 것도 베트남전쟁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의 방어는 아시아가 맡으라는 닉슨 독트린을 내세우면서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게다가 우리의 월남 파병에도 불구하고 7사단을 철수시켰다. 유리처럼 취약해진 한·미 동맹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기치로 방위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한·미 동맹은 지미 카터 행정부를 맞아 더더욱 흔들렸다. 인권과 도덕을 내세우며 한국 정부를 비난하던 카터는 급기야 주한 미군 철수까지 꺼내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굴하지 않고 철수할 테면 하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미 의회와 미군 지도부의 반대에 더하여 일본 정치권의 지원까지 겹치면서 양국 관계의 파탄은 수습될 수 있었다. 이런 충돌로 오히려 한·미 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우리 정부는 동맹 안보에서 50 대 50의 지분을 갖게 되었다. 한·미 동맹은 파탄의 기로에서 한·미 연합방위체제를 탄생시키며 더욱 단단해졌다.


탈냉전과 한·미 동맹의 정체성 위기

냉전이 끝나면서 공산권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한·미 동맹은 여전히 지속됐다. 탈냉전의 군비 축소로 주한 미군도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북한의 위협이 계속됐기에 동맹은 존속했다. 구공산권의 독재 국가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것을 보고 한·미 양국도 일말의 기대를 했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 외교로 러시아와 협력하며 통일 이후를 준비했고, 평시작전통제권을 미군으로부터 회수하는 한편 전시작전통제권도 회수하려고 했다. 미국은 걸프전까지 수행하면서 중동 안보를 관리하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국제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동맹은 존재했지만 미래는 불투명해 보였다.

그러나 1994년 1차 북핵 위기가 대두하면서 한·미 동맹은 다시 활발해졌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로 북한 핵무장을 막고자 했지만, 적극적인 비핵화보다는 현상 유지가 우선이었다. 게다가 진보 성향 정부로 바뀌면서 새 정부는 햇볕정책을 내세우면서 북한과 대화라는 실적을 추구했다. 온갖 미사여구가 오갔지만 진보 정권은 북한의 핵 개발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민족공조만을 반복했다. 미국에서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미 동맹은 불편한 공존으로 바뀌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이 9·11테러에 대응하면서 한·미 동맹도 바뀌어야만 했다. 특히 미군이 주둔형 군사력 대신 신속 배치형으로 전환하면서 미군 재배치계획(GPR)이 구체화되었다. GPR에 따르면 미군은 전력전개기지(PPH), 주요작전기지(MOB), 전진작전기지(FOS), 안보협력지(CSL)순으로 주둔 등급을 설정했다. 주일 미군은 PPH로 분류되어 미군 파병의 허브로 기능했지만, 주한 미군은 MOB에 그쳤다. 당시 정부는 별다른 일이 아니라고 의미를 굳이 축소했지만, 당시 좌파가 주도한 미군 철수 여론 등과 겹치면서 한·미 동맹은 또 다른 취약한 시기를 맞이했다.

바로 이렇게 한·미 동맹이 흔들리는 시기에도 북한은 꾸준히 핵 개발을 이어 갔다. 그리고 북한이 2006년 1차 핵실험을 하면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은 또다시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미 내상을 입을 대로 입은 동맹을 어떻게 되살려야 할 것인가는 이명박 정부의 몫이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정부가 내세운 개념은 21세기 전략 동맹이었다. 전략 동맹이란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 한반도에 머물지 않고 아시아와 국제 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관계를 의미했다.


전략 동맹으로의 험난한 길

그러나 막상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 전략 동맹으로 심화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광우병 루머로 집권 초부터 국정은 마비됐고, 2010년에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북한에 대한 대응에 여념이 없었다. 버락 오바마가 집권한 미 정부는 중국의 견제를 염두에 두고 아시아 회귀 전략(추후에 아·태 재균형 전략으로 재명명)을 펼쳤지만, 중국과 경제 협력에 여념없던 대한민국은 그 파트너로서 한계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에는 아베 2기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일은 전략 동맹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에는 또 다른 보수 정부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지만 한·미 동맹은 여전히 전략 동맹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정권 교체기를 맞아 정부는 중국 역할론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북한 포위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애초에 미·중 패권 경쟁 국면에서 북한보다 미국 견제에 집중하던 중국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라는 상황에서 한국은 중국의 보복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여기에 보수 정권은 유례없는 탄핵 국면에서 순식간에 권력을 잃어버렸다.

‘촛불혁명’을 외치면서 권력을 장악한 좌파 정권은 처음에는 대북 강경 기조를 유지하는 듯하면서 미국과 공조했다. 그러나 2018년 속내를 드러내면서 판문점 선언이나 평양 선언 등 정치 어젠다 위주의 대북 정책으로 트럼프 대통령까지 끌어들여 미·북 회담 국면을 만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비핵화보다 핵군축을 목표로 하던 북한의 딜을 미국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결국 미·북 회담은 실패했고, 우리에겐 한·미 연합연습 중단과 9·19 군사 합의에 의한 제한만 남았다. 한·미 동맹은 외피만 남긴 채 무너져 내리기 직전에 이르렀다.


한·미 포괄적 전략 동맹

이런 와중에 윤석열 정부는 포괄적 전략 동맹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그 내부를 살펴보면 과거 이명박 정부의 21세기 전략 동맹과 유사한 기조다. 비록 과거 동맹 전략의 앵콜송이지만, 이번에는 미국의 태도가 다르다. 바이든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일 만에 정상회담차 대한민국을 방문하면서, 한·미 정상은 전략 동맹에 합의했다.

북한 전술핵 위협에 노출된 우리는 전략 동맹 강화로 북핵에 대한 확장 억제를 견고히 해야만 한다. 반면 미국은 대한민국의 신흥 기술과 경제력을 미국 주도의 공급망에 편입시켜 대중 견제의 대오를 강화하고자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 첫 일정으로 국내 최대의 반도체 생산 시설을 방문하고, 대한민국의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가입을 방한 성과로 꼽는 것에서 이런 기조는 더욱 명백해진다.

문제는 우리다. 한반도 안보에서 국제 안보로 나아가려면, 안보를 뛰어넘어 기술과 경제 동맹으로 발전하려면, 그에 걸맞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 일례로 우리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적 협력이라는 비용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미국과 기술·경제 동맹은 필연적으로 중국의 견제와 보복을 불러올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비용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미국과 전략 동맹을 수행할 수 있을까. 미래 전략 동맹을 위한 비전과 이로 인한 이익을 정교히 설계하지 않는다면, 한·미 전략 동맹의 2차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