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다비드 르 브르통이 ‘걷기 예찬’에서 표현한 멋진 말이다. 걷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이 세계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면서 몸 전체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 관절을 움직이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다리 관절은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한 하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발자국을 옮겨 걷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때부터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걷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춘다.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았는 데도 몸 전체가 걷는 일에 기꺼이 복무하고자 한다.

 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기 시작해 보라. 우리의 몸은 막 시동을 건 엔진처럼 활기를 띠게 된다. 팔은 발걸음에 맞춰 저절로 흔들릴 것이며, 눈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샅샅이 탐색하며 나아갈 곳을 살필 것이며, 귀는 무한히 열리게 되고, 코는 벌름거리게 될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혼자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걷는 일이 유아독존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일이라면 의미가 없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 이 세계는 우리의 걷기에 동참한다. 풍경은 우리가 떠나온 곳이 궁금해 천천히 뒤로 지나가고, 달빛과 별빛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를 따라온다. 바람은 귀밑머리를 간질여 줄 것이며 땅은 발바닥을 떠받쳐 줄 것이고, 웅덩이는 웅덩이대로, 돌부리는 돌부리대로 유심히 우리의 걷기를 보살펴 줄 것이다.

 승용차가 별로 없던 시절,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참 많이 걸었다. 자동차는 걷기의 추억 따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수수밭머리에 해지는 풍경도, 마른 수숫대 위에서 뛰는 방아깨비도 보여주지 않으며, 수숫대가 서로 몸을 비비며 서걱대는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사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우리가 봤거나 들었거나 하는 풍경과 소리들은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일 뿐이다.

 몇년 전 평양에 갔을 때 부지런히 길을 걸어가는 북쪽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던 적이 있다. 이불 보따리만한 짐을 등에 지고 걷는 할머니도 있었고,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걷는 소녀도 있었고, 앉은뱅이책상 같은 걸 어깨에 메고 걷는 소년도 있었다. 모두들 힘에 부쳐 보였으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바삐 걷고 있었다.

 이제 남쪽 사람들은 의식주를 위해 걷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걸을 필요도 없다. 어지간한 거리는 자동차 바퀴가 걷는 다리의 수고를 덜어 주니까 말이다. 남쪽 사람들이 걷는 이유는 딱 하나. 바로 건강을 위해서다. 비로소 도시의 강변이나 등산로는 아침 저녁으로 걷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걷는 것으로는 모자라 뜀박질이 대유행이라고 한다.

 한쪽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걷고, 또 한쪽은 먹고 사는 일에 배가 불러 살을 빼려고 걷는 현실이 나를 참 아득하게 만든다. 남과 북의 경제력 차이일 뿐이라며 콧방귀 한번 뀌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뱃살을 빼기 위해, 건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는데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걷는 일이 돼선 안되겠다는 것이다. 내 뱃살이 두꺼워질 때 누군가 꼬르륵거리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얘기다. 그게 걷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자의 도리인 것이다. 이쯤에서 나도 걷는 일에 대해 멋진 표현을 한번 해보고 싶다.

  “걷는다는 것은 나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세계와의 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