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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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 서울대 경영학 박사,  현 윤경ESG포럼 공동대표, 현 세계중소기업학회 차기회장, 전 하버드대  방문연구원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 서울대 경영학 박사, 현 윤경ESG포럼 공동대표, 현 세계중소기업학회 차기회장, 전 하버드대 방문연구원

기업가 정신은 누가 먼저 기회를 잡는가 하는 타이밍 싸움이다. 일본 기업의 경쟁력을 설명하는 두 가지 특징은 일본의 네마와시(根回し) 문화와 장인 정신이다. 이는 의사 결정 속도가 빠르고 디지털 전환력이 빠른 한국 기업의 ‘빨리빨리(proacitveness)’ 문화와 대비된다. 양국의 기업 문화를 비교해보자.

첫째, 일본 기업은 만장일치의 네마와시 문화를 갖고 있다. 네마와시란 일본어로 나무를 옮겨심기 전 뿌리 주변을 파내 옮길 준비를 행하는 작업이다. 네마와시 문화에서는 어떤 결정을 할 때 사전 교섭 등을 통해 관계자들로부터 미리 양해를 구하는 사전 준비 작업을 거치도록 한다. 그래서 만장일치를 이끌어낼 수는 있지만 그만큼 의사 결정 과정이 길고 더딜 수밖에 없다. 결국 큰 전환적 혁신이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런 일본의 기업 문화는 한국의 ‘빨리빨리’ 기업 문화와 비교된다. 한국 기업 문화는 의사 결정이 빠르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혁신성을 갖는다. 이는 디지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화 기적의 원천이 됐다. 반면, 일본의 기업 문화는 의사 결정이 느리고 새로운 분야 진출에 보수적이다. 이런 기업 문화는 소니, 도요타 등 일본 기업이 세계적 품질을 갖는 원천이 됐지만, 디지털 기술, 전기차 시대로 전환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둘째, 일본의 장인 정신 문화다. 장인 정신은 새로운 분야로의 진출보다 기존 기술을 카이젠(개선)하는 것을 강조한다. 대신 새로운 변신은 금기시한다. 예를 들어, 라면을 만들던 회사가 서양식 메뉴를 개발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이는 특정 분야의 세계 최고 기업을 만들기도 하지만 과감한 기업 변신과 혁신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본 전자 기업들이 디지털 변신에 실패하고 일본 반도체 산업이 붕괴하면서 디바이스도 경쟁력을 잃었다. 반면, K기업가 정신은 기회 포착과 속도를 강조한다. 요즘처럼 기술 진화 속도가 빠르고 대전환하는 시기일수록 네마와시 문화는 변신의 가장 큰 약점이 되고 있다. 

빨리빨리의 K기업가 정신과 네마와시의 느린 일본 기업 문화가 대비되는 사건이 있다. 한국 기업에는 악몽과 같은 1997년 외환 위기 때다. 당시 삼성전자는 필사의 전략을 수립하고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그날은 ‘골든위크’라 불리는 일본의 연휴 기간이었다. 삼성전자는 이때 일본 디램(DRAM) 경쟁자들이 어떤 반격에도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골든위크가 시작된 바로 다음 날 삼성전자는 글로벌 시장에 그해 연말까지 소요되는 물량의 디램을 대폭 할인한 가격으로 쏟아부었다. 일본 반도체 업체로서는 비상 상황이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10여 일간의 연휴가 끝났을 때 그들은 이미 상황이 종료된 것을 깨달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치명상을 입은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 후 반도체 장비 투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니는 삼성전자에 비해 신장비 투자가 매번 6개월 정도 늦었다. 이 6개월 동안 삼성전자는 신규 시장에서 큰 수익을 올렸고, 뒤늦게 진입한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수익을 올릴 기회조차 없었다. 결국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몰락했고 삼성전자가 시장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날 삼성전자는 전 세계 기업 중 브랜드 가치 5위를 3년째 지키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에 따르면,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는 877억달러(약 115조원)에 이른다.

기업가 정신의 핵심은 기회 포착이다. 어떤 사람이 기회를 포착하는가? 빨라야 한다. 미국 기업가적 지향성에서도 빨리빨리를 핵심 요소로 본다. 한국 기업의 빨리빨리 정신은 주어진 기회를 경쟁자보다 선제적으로 포착하는 힘이 됐다. 물론, 한국 기업의 빨리빨리 문화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빨리빨리 정신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K기업가 정신의 핵심 DNA로 더 성숙하게 가꾸고 키워가야 할 요소다. 빨리빨리 정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한국 기업의 세계적 혁신과 변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