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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현대 거시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어록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다. 정부의 단기적 시장 개입을 옹호하는 그의 주장에 장기적으로 시장만 왜곡시키게 된다는 비판에 대해 그가 내놓은 반응이다. 장기적인 시장의 자정 기능과 균형 회복을 신뢰하던 신고전학파의 견해와 달리 케인스는 정부가 단기적 개입을 통해 유효 수요 부족을 해결하면 더 빨리 더 나은 균형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시장이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이 오래 걸리면 오히려 다 죽은 후가 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경제학에서 장기와 단기의 구분은 고정된 생산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다. 모든 것이 가변적이라면 최상의 균형점을 찾아가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변수를 정책 선택에 반영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당장 변화시킬 수 없는 생산 요소들 때문에 이러한 선택이 불가능하다. 케인스는 현실적 제약은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다른 모든 것은 동일하다고 가정)’로 두고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주요 변수만 이용해 최선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요는 생산의 결과로, 소득이 발생하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하던 기존 학계와 달리 케인스는 정부가 수요를 움직여야 한다는 새 발상을 내놨다. 그는 전 세계가 대공황에 빠진 1930년대의 해법으로 국가가 확대 재정 정책으로 수요를 통해 생산을 견인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전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대공황 극복에 성공하면서 케인스의 이론은 경제학의 신주류로 자리 잡았다.

거시경제학에서 생산 능력은 단기적으로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본다. 흔히 생산의 3요소 중 자본과 기술을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미 설치한 기계는 단기간에 바꾸기 어렵고 자본 축적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단지 수요 변화에 따라 노동 투입만 일정 수준 변경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가정이 변하고 있다. 자본시장이 글로벌화하면서 스스로 축적하지 않더라도 국내외 다양한 투자자의 자본을 활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기술도 디지털화를 통해 단기간에 효율성을 개선할 수 있게 됐다. 주요 기업들이 수조원에 달하는 투자를 시행하고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술을 이전하는 모습도 흔하다. 세테리스 파리부스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있다.

이제 장기 성장률만이 아니라 단기 성장률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투자다. 투자가 생산 규모를 확대할 뿐 아니라 기술을 개선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7월 발표한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 통계에 따르면 우리 경제의 설비 투자는 4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올해 2분기 설비 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7.9%를 기록했다. 전경련이 지난 3월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 중 가장 많은 30.1%가 투자 활성화에 가장 필요한 것이 규제 완화라고 답변했다. 

규제 완화 혹은 규제 개혁은 김대중 정부 이래로 모든 역대 정부의 주요 정책 과제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규제는 우리 기업의 투자를 저해하는 주요인으로 남아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규제 개혁은 가장 중요한 정책 과제로 제시됐다. 윤 대통령은 경제 성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기업 활동을 제약해 온 80여 개 규제를 즉시 폐지하고, 최소 규제 방식으로 규제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정부는 현재까지 총 1004건의 규제 혁신 개선 과제를 관리 중이다. 이 가운데 140건은 법령 개정 등 개선 조치를 완료했고, 703건은 관련 부처가 개선 조치를 이행 중이다. 규제혁신추진단, 경제규제혁신태스크포스도 활동을 시작하고 금융위는 36개 금융혁신 세부 과제를 발표했다.

장기 경제 성장을 결정하는 생산 요소가 변동 가능한 세상이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여전히 전과 동일한 규제 문제가 생산함수 변화를 가로막는 세테리스 파리부스 대상이 되고 있다. 정부의 규제 개혁 정책이 이 성장의 제약 요인을 변동시킬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