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유진맨숀 B동(왼쪽) 4~5층은 1994년 철거됐다.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서울 서대문구 유진맨숀 B동(왼쪽) 4~5층은 1994년 철거됐다.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서울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나와 통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3분 정도 걸어가면 내부순환도로 아래로 1970년 준공된 특이한 주상복합 아파트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로 200m의 길쭉한 건물을 따라 늘어선 넓고 높은 필로티(2층 이상의 건물 전체 또는 일부를 벽면 없이 기둥만으로 떠받치고 지상층을 개방시킨 구조의 건축물이나 그러한 공법). 웬만한 신축 아파트보다 더 크고 넓은 이 필로티는 군사적 목적으로 설계됐다. 유사시 이곳에 탱크를 배치하기 위해서다. 남북 군사적 긴장이 극심했던 당시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슬로건이 주택에도 스며들며 ‘서울 최후의 방어선’ 역할이 맡겨진 홍은동 유진맨숀이다.


유진맨숀의 필로티는 차량 2대가 들어가고도 폭이 넉넉하게 남을 정도로 넓고 높다.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유진맨숀의 필로티는 차량 2대가 들어가고도 폭이 넉넉하게 남을 정도로 넓고 높다.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김신조 침투 이후 서울 요새화 전략…‘싸우면서 건설하자’

1968년 1월 21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북한 특수부대 31명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했다. 군경의 불시검문과 소통 작전으로 29명이 사살됐다. 1명은 북으로 도주했고, 1명은 생포됐다.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 또는 ‘1·21 사태’로 불린다. 김신조는 생포 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하며 청와대를 격앙케 한다.

‘서울 요새화’ 작전은 이 직후 시작됐다. 서울을 하나의 거대한 군사 진지로 보고 곳곳에 요새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아파트나 고층 건물, 도로와 터널 등에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역할이 부여됐다. 청와대 경비 강화와 관광 겸용 목적으로 북악스카이웨이가 건설됐고, 평시 교통시설로 쓰다 유사시 30만~40만 명을 수용할 방공호 용도로 남산터널이 지어졌다.

유진맨숀은 도봉시민아파트(1970년 준공·현재는 철거)와 함께 아파트가 요새화된 최초 사례로 전해진다. 서울의 정북(正北) 방향엔 북한산이 자리하고 있어, 북한군 전차는 북서쪽 홍은동이나 북동쪽 도봉동을 거쳐 침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두 건물에 ‘서울 최후 방어선’ 역할이 주어졌다. 도시가 확장한 현재를 기준으로는 홍제동·도봉동보다 외곽에 위치한 주거지가 꽤 많지만, 1970년엔 이곳이 서울의 가장 외곽이었다.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영향인지 유진맨숀 건축과 관련해 당시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중점으로 어떤 작전을 고려해 설계했는지는 정확한 사료가 남지 않았다. 사실 군사용도로 지어졌다는 점도 재판 과정에서 최초로 알려졌다. 유진맨숀의 시공사 신성건설이 서울시에 제기한 하천 사용료 관련 소송(84누343)에 대한 대법원의 1985년 판결문에서 밝혀진 것이다.

“피고가 1969년 9월 4일 원고에 대하여 하천 복개 구조물 설치 및 상가아파트 건축허가를 하게 된 것은 당시 이 지역이 불량 지구로서 피고 시로서는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이 지역의 재개발 사업을 시행할 필요가 있었고, 또 군사상으로도 이 지역의 하천을 복개하여 건물을 세움으로써 유사시 탱크 등을 배치하여 수도 방위를 하는 등의 군사 목적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원고가 위 하천 복개 구조물을 설치함에 있어서 위 군사 목적에 맞추어 통상보다 견고한 규모와 구조로써 이를 설치하게 하였고 (중략) 특수한 군사 목적을 겸하는 것으로서 이는 피고의 권고 내지 종용에 의하여 건축되었다는 사정 등을 보면⋯.”

실제 아군 전차가 유진맨숀을 뒤로 두고 포신을 꺼내면 정확히 북쪽을 향하는 구조다. 또 이 필로티는 방어선이 뚫리면 기둥을 부수고 건물을 통일로 쪽으로 무너뜨려 북한 전차의 진격을 가로막는 역할도 맡는다는 해석이 있다. 위 대법원 판결문에는 유진맨숀이 ‘통상보다 견고한 규모와 구조’로 지어졌으며 신성건설이 공사비로 1억2500만원을 썼다는 내용도 나온다. 당시 정부가 영세 철거민을 대상으로 지었던 시민아파트는 동당 공사비가 1200만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사비를 수배나 더 쓴 것이다. 유진맨숀의 한 주민은 기자와 만나 “건물이 너무 단단해서 벽에 못 하나 박기가 힘들고, 수리공도 당황해 일을 마치고 공임을 더 달라고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1972년 2월 3일 촬영된 유진상가 일대 항공 사진.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1972년 2월 3일 촬영된 유진상가 일대 항공 사진.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B동 4~5층 ‘싹둑’ 잘려…과거 군 장성과 상류층 거주지로 유명

유진맨숀은 2개 동(A·B동)이 마주 보는 형태로 지어졌다. 지상 1층은 상가, 지상 2~5층은 아파트인 주상복합이다. 옥탑에 주거 시설이 일부 마련돼 주민들은 6층 건물로 부른다. 전용면적은 75~222㎡로 가장 큰 것은 67평형에 달한다. 서울 외곽에 있는 주택이지만 최대 67평형에 달할 정도로 넓은 면적과 당대 최신 아파트라는 점에서 고(故) 김영관 주월남 대사, 가수 김세레나, 군 장성, 청와대 직원 등 상류층이 거주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서울시는 1993년 내부순환도로 건설을 추진하며 이 도로 노선이 유진맨숀과 충돌하게 되자 유진맨숀 B동 4~5층을 1994년 철거했다. B동 전체를 보상금 총 150억원을 들여 수용했고, 나머지 1~3층은 철거와 존치 사이에서 고민하다 건물 상태가 양호하다는 판단으로 서울시 서류창고로 쓰기로 했다. 1996년의 일이다. 현재도 유진맨숀 B동은 4~5층이 잘린 상태로 ‘서대문구 공유 캠퍼스’로 쓰이고 있고, A동만 주상복합 아파트로 남아 있다.

B동 4~5층을 철거하는 데는 당시 최신 기술이자 현재까지도 건축물을 정교하게 철거할 때 쓰이는 공법인 ‘다이아몬드 와이어소’ 방식이 채택됐다. 이 철거 방식은 굴삭기에 집게처럼 생긴 압쇄기를 장착해 위에서부터 부숴가며 철거하는 일반적인 크러셔(Crusher·압쇄기) 공법과 비교하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기한 기술이다. 1993년 옛 광진교를 철거할 때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 공법이 사용됐고, 건물 중에서는 유진맨숀이 최초로 적용됐다.

6월 13일 찾은 유진맨숀은 준공 50년이 지난 건물임에도 근처에 ‘낙석 주의’ 표지판 하나 없이 튼튼한 모습이었다. 외부 도색만 일부 벗겨져 있었다. 과거엔 중상류층이 거주하는 아파트로 유명했지만, 요즘은 인왕시장 상인이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이날 만난 유진맨숀 주민 정모(73)씨는 자택 문 앞에서 마늘을 까고 있었다. 정씨는 “1970년대만 해도 아파트가 별로 없을 때여서 서민은 엄두도 못 내는 아파트였다”면서 “유진맨숀에는 ‘별자리(군 장성)’들이 많이 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주변 인왕시장 상인이 많이 거주한다”면서 “집이 넓고 튼튼해 살기에는 참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