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태평양 리서치본부장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태평양 리서치본부장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필자는 그동안 중국의 일부 산업이 어떻게 해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는지를 소개한 바 있다. 과거에는 저렴한 농민공(도시 이주 노동자)이 중국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었지만 지금은 저렴하고 풍부한 (고등교육을 받은) 엔지니어층이 중국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고급 인력을 잘 활용하는 일부 소수 중국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조업에나 적용될 것 같은 이와 같은 경쟁력 요소가 최근에는 중국 혁신 신약 산업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최근 일부 제약 기업들이 풍부한 과학자 인력을 잘 활용하면서 글로벌 신약 시장에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신약 산업에서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라니,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중국 제약 산업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중국 내수 제약 시장 구조를 보면 여전히 이머징(신흥) 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머징 국가 제약 시장의 전형적인 특징은 특허 만료된 화학약 등 기본 의약품 비중이 높은 반면 근래에 개발된 혁신 신약, 이를테면 자가면역치료제(TNF-a저해제)나 면역항암제(PD1 저해제) 비중은 낮다는 점이다. 혁신 신약의 가격은 한 번 치료 사이클에 수천만원에 육박하다 보니 소득 수준이 낮은 국가의 국민은 혁신 신약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제약 시장이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중국 제약사 중 일부는 글로벌 혁신 신약 최전선에 근접해 있다. 가장 놀라운 트렌드는 현재 글로벌 혁신 신약의 메인스트림이라 일컬어지는 면역항암제 부문에서 중국 토종 기업들이 이미 신약 4종을 판매 중이라는 점이다. 항암제는 보통 3세대로 나뉜다.

1세대는 키모세라피로 불리는 화학약, 2세대 항암제는 항체를 이용한 표적치료제, 3세대는 바로 현재 대세인 면역항암제다. 1세대 치료제는 저렴하지만 화학약이 신체의 모든 세포를 공격하다 보니 치료받다가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부기지수였다. 대신 약값이 저렴하니 이머징 국가에서는 화학 요법이 여전히 항암 치료의 표준으로 쓰이고 있다. 2세대 표적치료제는 항원-항체의 원리를 이용, 항체가 암세포 혹은 암 미세 환경의 특정 수용체만을 표적 공격하므로 부작용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표적치료제는 일부 암에만 적용 가능했으며 내성으로 인해 약효가 감소하는 현상이 심했다. 2015년부터 본격 판매된 3세대 면역항암제(PD1 혹은 PD-L1저해제)는 암세포가 억제한 면역 반응을 활성화함으로써 광범위한 암 종류에 높은 치료 반응률을 보여줬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중국 면역항암제 신약 세계 시장도 노크

면역항암제 신약의 대표주자는 미국 머크가 개발한 키트루다(Keytruda)다. 2015년 본격적으로 판매된 이후 2020년 기준 연 매출 15조원에 이를 정도로 초대형 신약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와 오노(Ono)가 공동 개발한 또 다른 면역항암제 옵티보(Optivo) 역시 연 매출이 10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이외 면역항암제로 유럽 로슈(Roche)의 티센트릭(Tecentriq)이나,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의 임핀지(Imfinzi) 등이 있는데, 이 네 개의 신약이 글로벌 면역항암제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글로벌 빅파마들에 의해 과점화된 시장에 중국 토종 제약사들이 도전장을 내놓은 것이다.

필자가 중국 기업들이 면역항암제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2017년 전후였다. 당시에도 중국 기업들 사이에서 혁신 신약 개발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승인받고 판매 중인 혁신 신약 사례가 드물었기 때문에 실체가 있는 얘기인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2019년 쥔스(君實⋅Junshi)를 필두로 헝루이(恒瑞⋅Hengrui), 신다바이오(信達生物⋅Innovent), 바이지선저우(百濟神州⋅Beigene) 등이 면역항암제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0년을 거치면서는 면역항암제의 매출 창출 능력이 검증됐다. 중국의 대표적인 제약사이기도한 헝루이제약은 면역항암제를 출시한 2년 차인 2020년 한 해에만 무려 6000억원가량의 매출을 올리면서 면역항암제의 잠재력을 현실로 바꿔놓았다. 중국 면역항암제 매출 2위인 신다바이오의 경우는 더욱 놀랍다. 이 회사는 2018년에 홍콩 증시에 상장할 때만 해도 개발 중인 신약 물질만 있을 뿐 사실상 영업 조직은 없는 벤처기업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의 면역항암제 매출은 2020년에만 4000억원에 이르렀다.

면역항암제는 매출 창출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래 성장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기도 한다. 최근 항암제 개발의 주요 트렌드는 면역항암제와 다른 종류 치료제를 병행해서 치료 반응률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면역항암제가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하면서 해당 기업이 신약 파이프라인을 확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중국 신약 개발사는 자사의 면역항암제를 중심에 두고 바이오시밀러나 화학약을 병행하는 수십 건의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면역항암제를 보유한 중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노크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신다바이오, 쥔스, 바이지선저우 등 중국 면역항암제 개발사들은 글로벌 파트너사 일라이릴리(Eli Lilly), 코헤러스(Coherus), 노바티스(Novatis) 등과 함께 FDA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FDA 승인 관행을 볼 때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2021년 중 미국 FDA로부터 승인받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중국 토종 기업들이 개발한 메인스트림 혁신 신약이 미국에서 판매되는 최초의 사례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신약 사업에 적용한 패스트 팔로어 전략

그런데 비즈니스 관점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 중국 기업의 면역항암제 판매 가격이 미국 것보다 무척이나 저렴하다는 점이다. 약 공급가를 추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나 CLSA증권 분석에 따르면 중국에서 면역항암제 공급가는 1000만원, 미국에서는 1억7000만원 정도로 추정된다. 복제약을 만든 것도 아니고 단지 몇 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동일한 메커니즘인 신약을 각기 다른 회사가 개발한 것인데 가격 차이가 어떻게 90% 이상 날 수 있을까.

이는 그동안 혁신 신약 산업계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현상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조업에서 통용되는, 패스트 팔로어 비즈니스 모델이 신약 산업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비즈니스모델이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혁신 제품 기능과 효능을 가장 빠른 속도로 모방하는 대신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독일·일본·한국·중국 기업들이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통해 선진국 기업을 따라잡은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제약 산업에서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잘 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혁신 신약 독점 판매권은 특허에 의해 최소 15년간 보장되는 한편 특허 기간이 만료되면 복제약, 바이오시밀러들이 등장하면서 약값이 50~90% 빠지곤 한다. 이러한 특수한 시장 환경은 후발 기업 관점에서는 애매모호한 비즈니스 환경을 의미한다. 뒤늦게 동일한 메커니즘의 신약을 개발해서 진입해봤자 조만간 특허가 만료되어 약값이 급락, 개발비 본전도 못 뽑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차라리 신약 특허가 만료되기를 기다려 복제약이나 바이오시밀러를 출시하게 된다.

둘째, 보통 혁신 신약 경쟁에서는 1위뿐만 아니라 2·3위도 글로벌 빅파마에 돌아간다. 혁신 신약이 등장할 때는 보통 중대한 과학적 발견이나 성취가 앞서기 마련인데 이는 학술지나 학술대회를 통해 널리 공유되기 때문에 혁신 신약이 하나 등장하면 메커니즘이 동일한 신약들이 빅파마들에 의해 몇 년 내로 여러 개 등장한다. 이들은 일종의 과점을 형성하면서 글로벌 주요 시장을 장악한다. 이렇게 되면 이머징 국가 기업들이 혁신 신약 시장에 침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최근 중국 신약 산업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중국은 풍부한 과학자 집단과 임상 환자, 넓은 내수 시장을 등에 업고 패스트 팔로어 비즈니스 모델을 시도하고 있다. 신약 산업에서도 패스트 팔로어 비즈니스 모델이 작동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신약 개발을 수행할 수 있는 고급의 과학자, 연구자 집단이 풍부하고 저렴해야 한다. 그래야 혁신 신약 임상 결과가 학술지에 등장할 때쯤 빠른 속도로 따라잡기를 시도할 수 있다.

중국 제약사들의 박사연구인력 채용 비용은 미국이나 유럽 그것의 20~30% 수준이다. 물론 인재 퀄리티 및 경험치에서 아직 차이가 많지만 질적으로 부족한 측면은 글로벌 빅파마에서 임상 및 BD(사업 개발) 경험을 쌓은 화교들이 돌아와 채우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정부 이후 중국으로 회귀하는 신약 관련 화교 인력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둘째 신약 개발에서 패스트 팔로어가 되려면 임상시험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약 개발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임상과 관련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적응증의 경우에는 임상 환자를 모집하는 데만 2~3년을 허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구 대국 중국은 특정 환자군을 모집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더욱이 신약 개발비의 60% 정도는 임상시험과 관련한 데에서 발생한다. 환자 모집 및 관리, 의사 및 의료 인력 고용, 임상 통계 분석 등에 큰 비용이 지출된다. 중국은 작용 메커니즘이 밝혀진 신약후보물질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셋째 신약 승인 이후 비교적 단기에 매출을 올릴 수 있게 내수 시장이 커야 한다. 이머징 국가의 후발 주자들이 혁신 신약을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미국과 같은 대형 시장에서는 이미 혁신 신약이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중국은 제약 시장 매출 규모로는 이미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이 되었다. 중국 기업들은 자국 시장에서 빠른 속도로 임상시험 승인을 받고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시공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신약 산업은 이런 면에서 아쉽다. 한국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과학자, 연구자 그룹과 대형 임상 병원 등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내수 시장이 너무 작다는 점이다. 한국 신약 개발사들은 투자비를 회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유럽 제약 시장을 목표로 해야 하고 그 나라에 가서 임상시험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현지 파트너사를 찾거나 복잡한 임상시험 준비 과정을 거치다 보면 수년의 시간이 지나가 버리고 패스트 팔로어로서 기회의 공간은 줄어든다.

필자가 볼 때 글로벌 혁신 신약을 주도하는 것은 앞으로 오랫동안 미국 빅파마와 미국 바이오테크 기업일 것이다. 기초과학연구 기반이 워낙 앞서 있으며 신약 개발에 따른 인센티브 수준이 높아서 창업가 의지도 강하기 때문이다. 중국 신약 산업은 성장 속도 측면에서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일부 제약사, 바이오테크 신생 기업들은 그동안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글로벌 신약 시장에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