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거슬 케임브리지대 교수 브라운대, 하버드대 박사,전 메릴랜드주립대 교수,전 밴더빌트대 교수 사진 조귀동 기자
게리 거슬 케임브리지대 교수 브라운대, 하버드대 박사,전 메릴랜드주립대 교수,전 밴더빌트대 교수 사진 조귀동 기자

“미국에서 보호무역 등 자국 우선주의 목소리가 강해지는 데는 1980년대 형성된 정치 질서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 자유무역과 세계화, 탈규제를 앞세운 신자유주의가 미국을 불행하게 했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같은 기조를 취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같은 사람이 더 많이 나올 것이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불안정성도 높아질 것이다.”

게리 거슬(Gary Gerstle)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앞으로 미국에서 자유무역 대신 ‘관리된 무역’이나 ‘공정 무역’이라는 슬로건을 쓰는 자국 이익 중심의 통상 정책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관리된 무역은 정부 개입을 상정(想定)한다. 공정 무역은 그 과정에서 무역 수지나 고용효과를 주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서 시작되고 빌 클린턴 대통령이 완성한 신자유주의 질서가 무너졌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와 미국이 주도한 국제 정치‧경제 시스템의 변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게 거슬 교수의 진단이다.

거슬 교수는 미국사학자로 2022년 ‘신자유주의 질서의 성장과 몰락’이라는 책을 써 국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미국 정치가 1940~70년대 뉴딜 질서에 이어 1980~2010년대 신자유주의 질서하에서 작동했다고 분석했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인 ‘질서’는 정책, 이데올로기, 유권자 연합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오랫동안 정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더 이상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과거 백인들의 일자리를 차지한 유색인종 때문에 백인들은 인종적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해지는 데는 미국 정치 지역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는 게 거슬 교수의 주장이다.

신자유주의의 붕괴는 “미국뿐만 아니라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경험한 영국 등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거슬 교수는 말했다. 또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모두 터져 나오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며 “어떤 정치 세력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거슬 교수에 따르면 국제 정치와 경제 질서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정치·경제 체제가 무너지면서 3~4개의 강대국이 경합을 벌이는 형태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왜 신자유주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나.
“약속했던 것을 더는 줄 수 없다는 게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 뉴딜 질서는 완전 고용과 준수한 소득, 번영하는 경제라는 비전을 이행할 수 없다고 다수의 미국인이 생각하면서 허물어졌다. 2010년 이후 신자유주의 질서의 붕괴도 불평등 확대, 양질의 일자리 감소, 노동 시장의 불안정성 심화 때문에 무너졌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백인 남성은 선진국에서 사망률이 증가하고 평균 수명이 감소한 거의 유일한 인구 집단이다. 알코올 중독과 자살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불행, 외로움, 고독, 기회 박탈 등에 의한 정신적인 문제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극단주의나 정치적 음모론에 빠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다른 선진국에서도 ‘자유무역’과 ‘규제 완화’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기존 정치 질서가 무너지는 건 비슷해 보인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집단은 크게 세 개다. 백인 노동 계급, 현재 진행형인 인종 차별 탓에 급격히 확대된 불평등의 피해자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고 프레카리아트(precariat·IT 기술의 발달로 급증한 불안정한 지위의 근로자) 비중이 높은 청년층이다. 불평등 확대와 불안정 노동, 질 좋은 일자리 감소는 산업화한 세계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브렉시트가 2016년에 각각 발생한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둘 다 소외되고 분노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했다.”

두 사건(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브렉시트) 모두 인종적인 요인도 강한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과 영국에서 안정되고 좋은 일자리를 갖고, 중산층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백인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사라진 일자리는 비백인 국가로 이동했다. 일부는 아시아로, 일부는 멕시코 같은 라틴아메리카로 갔다.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에서 비백인에게 졌다는 인종적인 인식이 경제적 상처와 결합해 대단히 강력하고, 독성이 가득 찬 정치적 동원을 만들어냈다.”

트럼프 전 대통령,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모두 기존 정치 질서가 무너지는 걸 보여주는 사례인가.
“이들은 모두 자유무역,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 글로벌 단일 시장을 반대한다. 많은 미국인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 지위를 유지하려면 결국 자유무역이라는 강력한 질서를 없애야 한다는 게 공통된 인식이다. 두 사람은 1990년대부터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당시에는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핵심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강력한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다. 미국 정치와 정책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겪고 있다고 봐야 하나.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중국에 부과한 관세를 없애지 않았다. 나아가 미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도록 각종 정책을 펴고 있다. 글로벌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대신 ‘관리된 무역’ 또는 ‘공정 무역’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미국은 한국 같은 다른 나라들과 통상 정책을 다시 짜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전환기라고 본다.”

앞으로 정치와 경제 정책은 계속해서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큰가.
“앞으로 더 많은 트럼프가 나올 것이다. 또 어떤 당도 우월한 입지를 차지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정치에서 변동성이 커질 것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의 경우처럼 여론조사는 점차 신뢰도가 낮아졌다. 불안정성과 변동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중도층이 보기에 ‘미친 것 같은’ 극단적인 인물이나 사상의 정계 진입 등이 늘어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도 정권 교체 주기가 짧아지는 등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보호무역주의 강화, 국내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 도입과 같은 명확한 트렌드도 존재한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확산을 이끌었다. 결국 국제적인 정치, 경제 질서도 변화를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이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던 시대는 끝났다.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에서 3~4개의 강대국 중 하나로 위상이 하락할 것이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해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이 각축을 벌였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3~4개의 강대국으로 유지되는 세계는 바로 트럼프가 그렸던 세계다. 하나의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 질서로 변화하는 과정은 아주 위험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19세기 강대국들의 세력 균형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