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명 공대에 진학한 한국인의 진로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한국에서 교수가 되거나 인텔·퀄컴 같은 세계적인 미국 IT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것. 요즘엔 제3의 길도 있다. 바로 창업이다. 이기하·김광록 82스타트업 대표는 실리콘밸리 한인 커뮤니티에서 ‘스타트업’이라는 새 길을 낸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2006년 할인 쿠폰 공유 사이트 ‘딜스플러스(DealsPlus)’를 출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2018년엔 초기(seed) 한인(韓人)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 ‘프라이머사제(Primer Sazze)’도 공동 창업했다. 

두 사람이 주축이 돼 1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에서 개최한 ‘82스타트업 서밋 2023’에는 700명에 가까운 한인 창업가와 관계자가 몰렸다. 창업자와 벤처 투자자들이 9개 세션에서 발표했고 스타트업 22개 사가 전시 부스를 마련했다. 82스타트업 서밋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가전 박람회 CES에 온 한국 사람이 연이어 가는 필수 코스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82스타트업을 이끄는 이기하·김광록 대표를 화상으로 만났다. 82는 국제 전화의 대한민국 국가번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82스타트업 서밋 2023 전경. 사진 82스타트업 서밋
82스타트업 서밋 2023 전경. 사진 82스타트업 서밋

교수의 꿈을 꾸고 유학했는데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기하 “내 인생은 벌써 3막이다(웃음). 공부 11년, 스타트업 13년을 하고 벤처 투자자가 됐다. 미국에서 유학하면, 전공(기계공학)이 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오히려 프로그래밍이 적성에 더 잘 맞았다. 남들이 필요하다는 웹사이트를 만들어주면서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를 만나 창업한 후배들을 멘토링하다가 벤처캐피털도 만들었다. 계획적으로 한 게 없다. 박사 과정 때 봤던 책을 한꺼번에 버렸을 때, 아내가 울었다.” 

김광록 “나 역시 공부가 적성에 맞는지 고민할 때 딜스플러스에 합류했다. 딱 6개월만 해볼 생각이었는데 매우 재미있더라. 그러다보니 18년 넘게 스타트업 업계에 있다. 데일리호텔·호갱노노 등 우리가 투자했던 회사들이 잘 성장하고 창업자들이 우리가 만든 투자 펀드에 참여할 때, 뿌듯했다.” 

올해 82스타트업 서밋에 700명이 가까운 사람이 몰렸다.
이기하 “한인 스타트업 종사자의 자그마한 브런치 모임이 점점 커지더니 2020년 첫 서밋에는 300명이 넘는 사람이 왔고, 코로나19 확산으로 3년 만에 열린 2023년 두 번째 서밋에는 700명 가까운 사람이 다녀갔다. 실리콘밸리에서 산전수전 겪은 창업가 스토리, 한국에서 ‘레전드(전설)’라고 평가받는 벤처 투자자들의 관점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입소문이 난 것으로 보인다. 국내 투자 기관과 대학 등 각종 단체에서 수십 명씩 왔다.”

김광록 “미국 유명 액셀러레이터(초기 스타트업 육성 회사) 와이콤비네이터에 입성한 한국 스타트업만 체커, 미미박스, 픽셀릭 등 8개 사에 이른다. 센드버드, 몰로코 등 한국인이 창업해 미국에 본사를 둔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도 5개 사나 된다. 실리콘밸리에서 성취를 일궈낸 한인 창업자들이 예비 창업자들에게 좋은 자극을 주고 있다. ‘나도 스타트업 성지인 실리콘밸리에서 도전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고, 서밋 참가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인 스타트업 모임인 82스타트업을 만든 이유는.
이기하 “한국과 이스라엘은 작은 영토, 자원 부족, 전쟁 위협, 뜨거운 교육열 등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기업은 100개 사가 넘는데, 한국 기업은 얼마 안 된다. 실리콘밸리에서 20년 넘게 살다 보니 두 국가의 큰 차이점을 발견하게 됐다.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인과 중국인도 서로 끌어주고 밀어준다. 우리는 ‘우리끼리의 네트워크’가 없다.

오히려 한인 부사장 아래에 한인이 별로 없고, 한인 감독관이 면접하면 한인이 손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다. 각박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페이잇포워드(Pay it forward·다른 사람에게 갚아라)’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좋은 커뮤니티가 있어야 좋은 스타트업도 계속 나온다.”

김광록 “페이잇포워드는 실리콘밸리의 정신 중 하나다. 아무것도 없는 내가 실리콘밸리에 와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으니,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려는 분위기를 말한다. 한국말로 하면 ‘내리사랑’ 정도가 될 것이다.”

K팝과 K드라마에 이어 K푸드 바람도 미국 현지에서 불고 있다. K열풍이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화에 어떤 영향을 주나. 
이기하 “K콘텐츠 덕분에 한국 국가 이미지가 좋아졌다. 하지만 ‘한국 스타트업이니까, 특정 분야에서 굉장히 좋은 상품을 만들 것이다’라는 기대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됐다. 특히 보안 분야에서는 투자자들이 이스라엘 스타트업을 거르지 않고 눈여겨본다.”

김광록 “전략적으로 K스타트업을 더 알릴 필요가 있다. 가령 CES에서도 프랑스는 공동 부스를 마련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관람객의 주목도를 높인다. 한국 스타트업은 각자 참석하는 탓에 부스 규모가 작고 자리도 구석진 곳에 있다.”

인플레이션 영향으로 스타트업의 자금 유치가 어렵다.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도 크게 떨어졌다.
이기하 “성장 단계에 있는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가 대략 30%가량 떨어졌다고 하더라. ‘다운 사이드(down side)’가 얼마나 오래 갈지에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광록 “그래도 2008년 금융위기 때만큼 어렵지는 않다. 당시엔 미국 경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빅테크들이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전체 고용 지표는 좋은 편이다. 구조조정을 당한 김에 창업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도 꽤 있다. 실리콘밸리 분위기는 우울일색이 아니다. 믹스(혼합)돼 있다.”

앞으로 82스타트업을 어떻게 이끌고 갈 생각인가. 
이기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운영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영리·비영리 법인 개설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 법률·회계 회사를 연결해 주는 등 스타트업을 위한 실질적인 서비스도 생각하고 있다.”

Keyword

페이잇포워드(Pay it Forward) 도움 받은 사람에게 되갚는(pay back)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선행을 전하는 것이다. 성공한 선배 창업자가 후배 창업자에게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것은 실리콘밸리의 전통이다. 멘토링(노하우 전수), 초기 자금 투자, 모르는 사람의 메일에 답하기 등의 문화가 대표적이다.

Plus Point

혹한기 스타트업 조언 다섯 가지

투자 혹한기 스타트업은 무엇을 해야 할까. 82스타트업 서밋 2023에서 나온 창업가와 투자자들의 조언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1│한국에서 시초가 된 제품과 트렌드로 창업하라. (존 남 스트롱벤처스 창업자)

2│단순한 성장만으로 안 된다. 수익까지 내야 생존할 수 있다. (이승훈 링글 창업자)

3│현금이 있다면 인수합병(M&A)할 좋은 시기다. (김제욱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부사장)

4│제품 핵심 가치를 더 날카롭게 다듬어라. (김동신 센드버드 창업자)

5│고객군을 아예 바꿔보라. (남태희 스톰벤처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