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부산지방법원 판사성균관대 법학사, 전 울산지방법원, 전 대전지방법원 근무 / 사진 박주영
박주영 부산지방법원 판사
성균관대 법학사, 전 울산지방법원, 전 대전지방법원 근무 / 사진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박주영 판사의 법정 에세이 ‘법정의 얼굴들’은 아름답고 눈물겨운 문장으로 가득하다. 작가가 됐어야 할 사람이 판사가 돼 죄 많은 인간과 죄 없는 인간 사이에서 몸소 서사(敍事)의 다리가 됐다.

학대 아동부터 소년범까지, 정신질환자부터 사형수까지…. 그가 그린 법정의 서사는 참혹하지만 정확하고, 정확하기에 더욱 생동(生動)한다. 그의 판결문은 오래 들여다보고, 많이 울어본 자만이 그릴 수 있는 구체적 사랑의 근경(根莖)이다. 죽은 자의 판결문은 부고가 되고, 산 자의 판결문은 우리 사회에 보내는 편지가 된다. ‘내 판결이 상처가 되길 바란다’는 부산지방법원 박주영 판사를 인터뷰했다.


높고 엄중한 언어를 쓰는 판사들 속에서 어떻게 낮고 부드러운 언어를 쓸 용기를 냈나.
“법률가의 문장으로는 좋지 않다(웃음). 공동 문서를 작성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훈련받은 문장을 쓰지만, 단독 재판을 할 때만큼은 판결문에 시와 경구도 인용하며 자유롭게 썼다. 마음을 담아 솔직하게.”

솔직하기가 정확하기보다 어려운 법이다.
“여태껏 법원의 솔직한 이야기가 없었지 않나. 판사들은 신비주의에 익숙해서 많은 걸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알아서 이해하라는 식이었다. 나는 변호사를 하다가 경력 법관제도로 법원에 와서 공보판사로 일했다. 당시에 기자와 판사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했다. 기자가 의미를 물으면 판결의 경위와 맥락을 설명했다. 그런 경험으로 내가 쓰는 판결문만큼은 되도록 길게 자세히 풀어서 쓰려고 했다.”

판결문을 쓰면서 읽는 독자를 생각했다는 건가.
“그렇다. 판결문의 주된 독자는 상급심과 당사자다. 그런데 지금 판결문은 상급심만 주된 독자로 생각한다. 사건 당사자가 배제돼 있다. 당사자가 이해해야 판결에 오해가 없지 않나. 일반 사람은 사건의 표면만 보니 선고된 양형이 ‘낮거나 높다’고 비난할 수 있다. 기자도 국민도 왜 어떤 강간죄는 3년이고 어떤 건 5년인지 한눈에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판결문에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재판에서 피고인과 피해자의 서사가 양형에 영향을 미치나.
“물론이다. 가령 자녀 살해의 경우 중형을 선고하는 게 맞다. 검찰은 5년을 구형했고, 나는 4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맥락을 보면 집행유예를 선고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발달장애 자폐 아이를 최선을 다해 돌보다 벼랑 끝에 몰려서 아이는 죽이고 자기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바보가 된 상태였다. 스스로 왜 법정에 와 있는지도 몰랐다. 그 상태로 교도소 들어가면 케어하느라 교도관들이 더 고생이다. 하지만 그 행위가 더 이상 참작돼서는 안 되겠기에, 눈물을 머금고 4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판결문에 자세히 썼다. 선고되지 않은 나머지 형은 우리 사회가 져야 할 몫이라고.”

문득 궁금하다. 판단할 때 직관을 많이 사용하는 편인가.
“(미소 지으며) 변호사 할 때 나도 그게 궁금했다. 판사는 어떤 이유로 저런 결론을 도출할까? 증거를 모아 결론을 내리는 귀납법을 쓸 것 같지만, 아니다. 오랜 경험으로 닦은 직관이 있다. 느낌이 오면 자료를 보면서 내 가설에 맞는 증거를 검증해 간다. 평소 법리와 증거를 보는 훈련이 돼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도 편견과 확증 편향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을 배제하면 안 된다. 내 가설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반대 증거가 나오면 과감히 내 가설을 부숴야 한다.”

얼마 전엔 뇌출혈 아버지를 방치한 한 청년의 간병 살인이 인구에 회자했다. 가해자이지만 생활고로 전기와 통신까지 끊어진 서사가 공개돼 많은 사람이 탄원서를 썼다.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2심에서도 형량이 줄지 않아 의아했다.
“판결 전문을 읽어보니 법률적으로 타당한 양형이었다. 셜록이라는 매체에서 청년의 고난을 탐사 보도했지만, 재판부 입장에서는 번복하기 어려웠을 거다. 존속살인은 징역 7년 이상이고 절반을 깎아도 3년 6개월이다. 그러면 집행유예가 안 된다. 아무리 가여워도 무죄가 아닌 이상, 유기치사가 아닌 존속살인으로 기소를 한 이상, 판사로서도 어쩔 수 없다. 다만 판결문에 좀 더 상세히 썼더라면 인정머리 없다는 비난은 안 받았을 텐데…, 아쉽다.”

최근 들어 법원의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지적도 많다. 박주영 판사가 ‘오프라인 N번방’이라고 지칭된 가출 청소년 성매매 강요 사건에 도합 102년 형을 선고하지 않았나. 어마어마한 형량이다.
“12명의 양형 총량이 102년이었다. 선제적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사이렌이었다. 그런데 성인지감수성은 법원 내부에서 변화도 있지만 저항도 있다. 피해자 진술의 증거 능력이 올라가고, 결국 유죄 확률이 높아지니, 형사법상의 ‘무죄 추정의 원칙’과 부딪치는 게 사실이다. 나는 현장에 있다 보니 페미니즘 논쟁이나 그 이론적 배경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당장 맞아 죽는 여자와 아이들, 강간당하고 자살하는 군대 내 여성들…, 그들 앞에서 칼을 치우는 게 급하다. 대중이 아는 것보다 다급하다. 친부, 계부에 의한 성범죄가 정말 많다.”

재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피카소의 ‘우는 여인’이라고 했다. 아이를 죽여서 울고, 아이가 죽어서 울고, 맞아서 울고, 강간당해 우는 소리가 선명한데,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없다는 얘기는 말이 안 된다고 일갈했다.


박주영 부산지방법원 판사. 사진 박주영
박주영 부산지방법원 판사. 사진 박주영

가난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더 참담한 비극이더라고 했다. 실제로 모든 죄를 파고들어 가면 나오는 건 돈인가.
“탐욕 아니면 돈이다. 탐욕이 개인적인 영역이라면 돈은 사회적인 영역이다. 가난하다고 다 범죄 에너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빈곤 범죄는 사회적 영역이다. 그래서 내가 그런다. 사람은 안 미워해도 가난은 미워한다고. 마약 중독이나 자살 방조는 다 사회적 예산과 인프라 부족으로 생긴다. 그런데 추적해 보면 돈은 늘 어딘가에 다 있다. 소년부 판사할 때 여가부와 지자체 아동·청소년과를 설득해서 가출 청소년 쉼터 보조금을 만든 적이 있다. 법원은 예산이 거의 없어 양해각서(MOU)까지 교환해서 다른 기관에서 돈을 끌어왔다. 현실이 그렇다. 우리는 수습하고 뒤처리할 뿐, 사법 절차나 정책 수립은 입법과 행정의 영역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악’도 만난다. 우리가 어떻게 악인의 얼굴을 식별하고 피할 수 있을까.
“(한숨 쉬며)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잘 모른다. 성범죄의 50% 이상이 아동·청소년에게 벌어진다. 웃는 얼굴로 구분이 안 되는 자기애성 인격장애, 사이코패스가 많다. 법정은 온갖 종류의 악이 흘러드는 바다 같다. 우리 자신도 방심할 수 없다. 선에 무관심하면 순식간에 흑화한다. 판사조차 선과 악의 경계를 걸어간다.”

악을 피할 방법은 없나.
“스스로가 염치와 양심을 지키며 사는 수밖에 없다. 염치와 양심을 나는 거꾸로 난 가시라고 말한다. 제 몸을 파고드는 가시가 많은 사람은 늘 염치를 생각한다. 그런데 돈처럼 양심이나 공감 능력도 이미 가진 사람이 더 가진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더 상처받고 악한 사람은 더 뻔뻔해진다. 내 피고인 중에 정신질환자가 있었다. 너무 착한데 어머니를 칼로 찔렀다. 연약한 마음이 벼랑 끝에선 흉기가 될 수도 있으니 안타깝다.”

인간으로 죄짓고 산다는 것의 부끄러움을 알면, 염치 있는 자들의 천국이 되지 않을까. 한 사회의 염치가 적정 수준으로 지켜지려면 무엇이 선행돼야 하나.
“법정에서 보면 성범죄 피해자가 자기 탓을 한다. 안타깝다. 그때 나는 불러서 꼭 말해준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은 ‘잘못이 외부에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악인들이 정신 차리려면, 약하고 염치 있는 사람들이 씩씩하게 잘 살아야 한다. 그래야 악이 상처받는다.”

성공한 재판은 마음을 움직이는 재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작은 소송도 몇 년에 걸쳐 수십 건의 더 큰 소송으로 비화된다. 제일 무서운 게 감정싸움이다. 마음이 풀리면 수십억원 소송도 조정으로 해결된다. 법원의 최종 목적은 분쟁 해결, 갈등 해소다. 마음이 통해야 말끔하게 해소된다. 형사 재판은 민사와는 다르다. 사회적 피해가 있어 합의나 갈등 해결이 최종 지향은 아니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형벌을 부과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한다는 목적이 있다. 그 첫 단계가 실체적 진실이다.”

실체적 진실은 밝힐 수 있나.
“우리는 실체적 진실을 찾지만, 아닐 가능성이 크다. 누구도 모른다. 현장에 있어도 모른다. 그래서 나중에 증거를 모아 절차적 진실을 추구할 뿐이다. 그렇게 형사 재판 절차로 찾은 진실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게 옳은가? 법대로 하는 게 정의인가? 우리는 또 질문할 수밖에 없다.”

유한한 시간과 문화를 사는 인간이 정의를 고정시킨다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미국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례법을 따르지 않나.
“정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있다. ‘같은 걸 같게, 다른 걸 다르게’, 범주화만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의 구현은 쟁취가 불가능하다. 다만 그 열망을 버리지 않는 거다. 그래야 재판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일정량의 평화와 안식을 줄 수 있으니까. 피해자에게는 위로와 치유를, 피고인에게는 죄지은 만큼의 처벌을, 법정에는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양형을, 사회적으로는 당사자 간 갈등 해소와 유사 범죄 방지를.”

앞으로 판결문이 공개되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
“판결문 전면 공개라는 원칙은 이미 세워졌다. 하급심 판결이 전면 공개되면 무수한 공격에 시달릴 거다. 언론, 시민단체, 학계의 비판이 만만치 않겠지. 그래도 해야 한다. 하급심의 판결문은 사회 현상에 대한 법적 기준이 된다. 국민이 법의 잣대를 제대로 알아야 지켜나갈 수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판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판사는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이다. 약자가 기댈 최후의 보루다. ‘판결문’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지키고 있어서, 매일 밤 이렇게 집에도 못 가고 늦은 시각까지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