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사진 위키미디어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사진 위키미디어

늦은 오후, 시계와 창문 너머 어두워진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니 짧은 탄식이 나온다. 벌써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며칠 전만 해도 오후 5~6시에야 어두워졌지만 이제는 시곗바늘이 오후 4시를 가리킬 때부터 가로등이 켜진다.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부터 서머타임이 끝나고 표준시로 돌아갔다. 오후 11시까지 밝았던 여름 하늘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겨울이 가까워졌다는 것만 느껴진다.

비록 다소 춥고 어두워지면서 야외 활동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공연장의 조명은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고, 공연장은 문을 활짝 열고 관객을 반기고 있다. 바로 유럽 공연장의 겨울 성수기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선다. 오늘 저녁,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오페라 공연이 열리는 날이다. 필자가 볼 공연은 프랑스 바로크 작곡가 장 필립 라모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다. 17세기 극작가 장 라신의 비극적 희곡 ‘페드르’를 바탕으로 라모가 1733년 50세의 나이로 발표한 첫 오페라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를 배경으로 페드르라는 왕비가 자신의 양아들 이폴리트를 사랑하며 펼쳐지는 비극적 스토리이고 예나 지금이나 금기로 여겨지는 소재로 감정적 긴장을 끌어올리는 극적인 오페라다.

오페라가 공연될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홈페이지를 보니 바로크 원전 연주로 유명한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그리고 한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였던 사이먼 래틀 등 세계 정상급 음악가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 있어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이름이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현대 미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Olafur Eliasson)’이다. 그는 오페라 무대와 의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이가 아니라, 현대 미술가다.

올라푸르 엘리아손은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덴마크 출신의 미술가로서 현재 세계 현대 미술계의 중심에서 ‘스타’로 불린다. 설치 미술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빛, 물 등의 자연적 재료로 세계적 이슈인 기후 변화의 메시지를 비롯해 자연 및 인간 근원에 질문을 던지는 듯한 명상적인 작품들로 유명하다. 지인의 소개로 그를 알게 된 후부터 몇 달간 열광적으로 그의 작품을 찾아 헤맸던 터라, 그가 18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공연된 라모의 오페라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다. 오페라는 청각과 시각을 모두 어우르는 종합 예술인 만큼 연주자뿐만 아니라 연출 및 무대, 의상, 조명 등 함께 공연을 만들어가는 모든 이의 예술적이고도 전문적인 역량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렇기에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어떠한 역량을 펼칠지 더 기대되기도 했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정문으로 들어가 백신 접종 여부를 체크한 후 공연장 내부로 들어섰다. 반원형 극장 내부로 들어서자 천장에 화려한 샹들리에를 비롯해 수많은 조명이 불을 밝히며 필자를 반겼다. 잠시 후, 장내는 어두워지고 사이먼 래틀이 지휘단에 등장하며 서곡과 함께 공연이 시작했다. 서곡이 끝날 때쯤 본격적으로 오페라가 전개됐다.

필자가 이날 오페라에서 주목한 점은 바로 300여 년 전에 작곡된 오페라가 현대의 연출과 어떻게 만났는지였다. 18세기 당시 연출 및 무대, 의상을 고증해 무대에 그대로 올린 게 아니라, 현대 미술 작가가 펼친 새로운 예술적 해석이 궁금했다. 또 이러한 새로운 관점이 감상자에게 납득되고 또 감동을 줄 것이냐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무대 연출로 참여한 오페라. 사진 스튜디오 올라푸르 엘리아손·비메오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무대 연출로 참여한 오페라. 사진 스튜디오 올라푸르 엘리아손·비메오

사실 과거의 사회, 생활, 의식 등이 담긴 수 세기 전 작곡된 오페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큰 도전이다.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현대인이 사극에 나오는 대사를 하거나, 현대 언어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단어로 대사를 읊는다고 생각해보자. 오페라에서 왕, 귀족으로 설정된 인물이 군인, 의사, 운동선수, 매춘부 등으로 나오거나, 궁전이 공장으로 나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거를 현재로 구현할 때 보는 이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무대 연출에서는 이러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원초적인 재료로 현대적 해석의 어려움을 넘어섰다. 바로 빛이다. 그는 거창한 무대 장치 없이 빛과 이를 반사하는 거울, 이 두 개의 재료를 가지고 공연장을 우주 한복판으로 탈바꿈시켰다. 우주는 시공간을 초월한 곳이기에 18세기의 라모가 21세기의 시각 예술과 만나며 발생할 수 있는 이질감은 느낄 수 없었다. 몇 쌍의 발레 댄서가 그들을 겹겹이 둘러싼 거울과 함께 군무를 보여주기도 했고, 무대 뒤편의 초대형 거울이 관객석을 비춰 관객과 무대의 성악가들이 한 무대에 서서 같은 감정을 나누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천장과 벽 등 사방에서 비추는 레이저 빛은 라모의 작품을 우주 한 공간으로 옮겨 놓은 듯했다.

오페라가 끝나자, 많은 관객이 기립하고 열광했다. 18세기 음악이 현대 미술과 만나 새로운 해석을 계속 창출해내는 ‘영속성’을 보여줬다는 점이 많은 이를 고무시켰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보였다. 오페라에서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공연을 반추해보니, 라모가 써넣은 창의적이고 대담한 화성, 연주법, 아름다운 아리아 및 성악가의 연기는 거의 기억에 없었고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선보인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반짝였던 레이저 빛만 기억에 남았다.

과거 평론을 찾아보니, 필자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했다. 2018년 프로덕션이 초연될 당시, 독일 주요 매체의 평론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무대 연출에 악평을 보냈다. 심지어 독일의 권위 있는 BR Klassik에서는 “오페라가 아닌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레이저 쇼를 보고 싶으면 가라”고 평했을 정도다. 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에서 클래식 음악이 21세기를 넘어 앞으로도 지속할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

클래식 음악 그리고 유명 작가와 음악가의 해석이 합쳐진 ‘이폴리트와 아리시’는 또 다른 해석적·미학적 논란을 낳았다. 또 그 논란은 공연장 밖으로 나와 전문가, 관객, 각종 미디어를 통해 분석되고,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 18세기 예술이 현대 예술과 만나고, 우리 삶에서 예술이 무엇인지 근원적 탐구를 하고, 성찰할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이 오페라는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새롭고 과감한 시도가 없다면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나 했을까. ‘이폴리트와 아리시’를 두고 클래식 음악이 발전하고 영속성을 갖게 되는 데 한몫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세계적인 미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

사진 조선일보 DB
사진 조선일보 DB

1967년 덴마크 코펜하겐 출생으로 현재 베를린에 그의 이름을 딴 스튜디오를 설립해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적, 초자연적 현상에서 영감을 받아 빛, 물, 거울 및 만화경을 이용한 반사를 활용한다. 이를 통해 설치 작품 등을 창작하며 기후 변화에 따른 경각심 및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파리 및 런던 중심부 광장에서 그린란드에서 부유하는 빙하 조각을 전시하며 기후 변화를 테마로 삼은 ‘아이스 와치(Ice Watch)’, 전기 시설이 없는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이들을 위한 솔라 램프 작품 프로젝트인 ‘리틀 선(Little Sun)’을 비롯해 세계 주요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안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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