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세기 전후 불교의 혜원(慧遠), 도교(道敎)의 육수정(陸修靜) 그리고 유가의 도연명(陶淵明)이 호계(虎溪)에서 파안대소했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 각자의 다름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서로 화합할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사진 바이두
서기 5세기 전후 불교의 혜원(慧遠), 도교(道敎)의 육수정(陸修靜) 그리고 유가의 도연명(陶淵明)이 호계(虎溪)에서 파안대소했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 각자의 다름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서로 화합할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사진 바이두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작품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 넘은 나비 깊이깊이 보이고, 물 찬 잠자리 느릿느릿 날아오르다(穿花蛺蝶深深見, 點水蜻蜓款款飛).” 바람에 꽃잎이 무수히 흩날리는 어느 늦은 봄날, 시인의 눈에 비친 장안(長安) 부근 곡강(曲江)의 한 정경이다. 40대 후반의 하급 관리인 가난한 시인이 퇴근 후 봄옷을 저당 잡히고 강가의 술집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돌아오면서 읊은 것이다. 고희(古稀)의 어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 바로 그 시다. 1400여 수나 전해지는 두보의 전체 시작 중에서도 특히 명구(名句)로 꼽힌다. 지난 1000여 년 동안 역대의 수많은 시인 및 평론가가 모두 인정해 온 바다.

그런데 유독 북송(北宋)의 성리학자 정이(程頤)는 이 구절을 콕 찍어서 “이런 쓸데없는 말은 해서 무엇 하나(如此閑言語, 道出作甚)”라는 폭언을 했다. 곁들여 “시문 짓는 일은 학문에 방해가 되지만, 꼭 지으려면 ‘그 속에 도를 실어야(文以載道)’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만의 세계에 함몰돼 다른 세계의 가치를 낮추어 보거나 존재 의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유사한 예는 서양에도 있다. 플라톤의 이른바 ‘시인추방론’이다. 세상 만물은 근원적 진리인 이데아의 모방으로 생겨났고, 시인은 이데아를 모방한 그 사물을 다시 모방하는 자이므로 진리에서 두 단계나 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유다. 따라서 사회의 건전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 이상 사회에서는 그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비롯한 문화·예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경향은 실용을 표방하는 부류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묵자(墨子)가 그 선구자다. 그는 ‘남도 나처럼 사랑하라’는 ‘겸애(兼愛)’와 ‘남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비공(非攻)’을 부르짖었지만, ‘예악(禮樂)’을 중시하는 유가에 대해서는 ‘허례허식에 치중해 민중을 괴롭히는 자들’이라고 맹공격했다. 그의 기준에 의해 민중의 생활과 사회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단정된 ‘의례’와 ‘음악’ 등 문화 행위와 이를 조장하는 유가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전국시대 말기 강력한 법치와 군주의 권술(權術)에 천착한 한비(韓非) 역시 실용에 도움이 안 되는 문학과 예술을 부정해 이를 금지하자고 주장했다. 그와 동문수학한 이사(李斯)는 진시황(秦始皇)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뒤 재상으로서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미증유의 문화적 대재난이다. ‘분서’에서는 문화·예술뿐 아니라 엄혹한 법치의 실행에 방해되는 법가 이외의 모든 서적이 불태워졌다. 화를 면한 것은 의약과 점복(占卜)과 나무 심기에 관한 것뿐이다. ‘갱유’에서는 도성 함양(咸陽) 일대에 거주하던 460여 명의 유생이 검거돼 한꺼번에 생매장됐다. 식자들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극단적 조치였다.


‘10년 호겁(浩劫·대재난)’이라고 일컬어지는 1966~ 7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의 포스터. 문화대혁명은 정치가 한쪽 극단으로 치달을 때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다. 사진 바이두
‘10년 호겁(浩劫·대재난)’이라고 일컬어지는 1966~ 7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의 포스터. 문화대혁명은 정치가 한쪽 극단으로 치달을 때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다. 사진 바이두

이사는 원래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진나라에 와서 출세했다. 벼슬살이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왕이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타국에서 온 관리 중에 간첩 활동을 하는 자들이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사가 분연히 글을 올려 호소했다.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다. 여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아 그 거대함을 이룰 수 있었고, 강과 바다는 가는 물줄기도 가려내지 않아 그 깊음을 이룰 수 있었다(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이 글에 진왕이 설득돼 축객령은 철회됐다.

그런 사람이 ‘분서갱유’라는 대재난을 야기하도록 사주한 원흉으로 변했다. 결국 그는 지역 차별의 한계는 극복했지만, 이념과 사상의 벽은 넘지 못하고 일시적인 정국 안정을 위해 극단으로 치달은 셈이다. 세상은 엄한 형벌로 다스려야 평온해진다는 자기만의 정치철학에 스스로 마취돼 천추만대에 사라지지 않을 죄업을 남긴 것이다. 그로 인해 만세까지 이어가도록 하겠다고 이름까지 ‘시황’으로 지은 진시황이 죽은 뒤 불과 몇 년 만에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교훈을 얻기 위해 가정도 필요하다. 만약 진시황이 한쪽에만 집착하지 않고 대중의 안정과 사회의 화합을 위해 조금만 노력했더라도 수십 년간 공들여 이룩한 왕조가 그렇게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0세기 중엽 50여 년간 지속된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평정한 송(宋)은 당(唐)과 오대의 군벌 발호 역사를 거울삼아 정권의 안정을 위해 무인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국경 수비군의 지휘권까지 주로 문관에게 맡겼다. 이에 따라 국가 전체의 전력도 약화됐다. 그 결과 북쪽으로는 거란의 요(遼)와 서쪽으로는 티베트의 서하(西夏)에 시달리면서 마침내 여진의 금(金)에 의해 나라의 절반을 빼앗겼다. 겨우 남쪽으로 피난 간 왕조가 명맥을 이어가지만 시종 금에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결국 금을 정복한 몽고족에 멸망됐다.

중용(中庸)의 도가 소중함을 실증해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중용이 쉽게 실천될 수 있는 덕목이면 그리 강조되지도 않는다. ‘중용’에서는 공자의 입을 빌려 “중용의 덕은 지극히 훌륭하지만 사람들은 오래 지속할 수 없다(中庸其至矣乎, 民鮮能久矣)”고 말한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사람조차 한 달을 지키지 못한다”는 한탄도 있다. 심지어 “천하와 국가를 고르게 할 수 있고, 부귀영화도 사양할 수 있고, 흰 칼날을 밟을 수는 있어도 중용은 불가능하다”라고까지 단언한다. 인간에게는 욕심, 증오, 교만, 우매, 아집 등 부정적인 내면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도 사람은 친근함, 사랑, 경멸, 미움, 두려움, 존경, 슬픔, 연민, 교만 등을 느끼는 대상에 대해서는 마음의 중심을 잃기 때문에 좋아하는 대상의 나쁜 점과 미워하는 대상의 좋은 점을 아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한다.

흔히 ‘중립’ 또는 ‘중도’라는 말을 ‘중용’과 혼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 나아가 우파와 좌파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중간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중용의 도가 될 수는 없다. 즉 중용의 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말처럼 ‘시시비비(是是非非)’와 ‘공정’이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일본 에도(江戶) 시대 초기인 17세기 전후 20여 년간 쇼군(將軍)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에 의해 실시된 ‘쇼루이아와레미노레이(生類憐みの令·생명체를 불쌍히 여기는 영)’는 일본사에서 중용의 도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개띠 쇼군은 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느 날 전국에 개를 잡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의 학대도 해서는 안 된다는 영을 내렸다. 그 뒤 점점 범위를 확대해 모든 육상 동물뿐 아니라 물고기, 조개, 새우 등의 포획도 금지했다. 이로 인해 꽤 많은 사람이 극형까지 당했으며, 심지어 모기를 죽였다고 처벌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고 나선 사람들, 그중에서도 대선 후보들은 자신의 언행과 주장과 공약들이 중용의 도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재삼 점검해야 할 때다. 특히 역병 시국을 볼모로 ‘불쌍한 백성을 가엽게 여기는 영’을 남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완벽하게 중용의 도를 실천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나마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후일 나라를 그릇된 길로 몰아가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