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은 너른 바다를 한가득 품었다.안면도 꽃지해변은 많은 이가 바다를 그리며 찾는 곳이다. 사진 이우석
태안은 너른 바다를 한가득 품었다.안면도 꽃지해변은 많은 이가 바다를 그리며 찾는 곳이다. 사진 이우석

따지고 보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고통은 불과 1년 남짓. 벌써 지치기엔 이르다. 그래 기나긴 역사 속 어찌 어려움이 없었으랴, 우린 모든 것을 버티고 살아왔다. 온 천지가 전화(戰禍)에 휩싸인 왜란은 7년 가까이 지속됐다. 불과 75년 전 끝난 일제강점기는 무려 36년간 지속됐으니 이제 돌아올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

수평과 바다 향이 그리워 문득 충남 태안군을 떠올렸다. 태안(泰安)은 클 태, 편안한 안을 쓴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마음이 놓인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락하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에서 나왔다. 세곡선과 무역선이 지나던 뱃길(조운로)이 있고, 이곳 물살이 빠르고 험해 지나는 배의 무사안녕을 바랐던 까닭이다.

‘내게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일은 인간의 본연인 듯하다. 금속과 유리, 시멘트로 쌓은 수직(垂直) 속에 살다 보니, 방해받지 않는 평행이 절실하다. 수평선(水平線)이다. 광합성이나 비타민 등 자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수평이 태안 앞바다에 있다.

서해 한가운데 위치한 태안은 반도 지형으로, 삼면이 바다와 접했다. 안면도를 품은 태안은 그 때문에 사연도 많다. 원래 한반도에서 폭 대비 길이가 가장 긴 반도였던 안면도는 1638년(인조 16년) 세곡을 나르기 위해 중간에 운하를 파는 바람에 섬이 됐다. 330여 년 후인 1970년대 다리(안면대교)를 놓아 다시 육지가 됐다.

안면도 덕분에 무척 긴 해안선을 지녔다. 무려 559.3㎞. 서울~부산 거리보다 길다. 도서 119개, 항·포구는 42곳이 있다. 꽃지와 만리포 등을 제외하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해수욕장만 해도 29개다. 전체가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조운선이 지나는 까닭에 왜구의 노략질 위협이 늘고 그 탓에 태안군은 숱한 상실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 묵묵히 바다를 지켜온 태안은 독살(석방렴), 간장게장, 게국지, 자염(煮鹽) 등 다양한 바다 문화유산을 남겼다. 독살로 유명한 별주부마을엔 ‘토끼와 거북이’의 전설이 서렸다. 거북을 닮은 자라섬이 있고 그 아래에 용궁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수간만의 섭리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원시 조업 방식을 지금껏 지켜오는 곳이다. 돌을 주워다 작은 풀장 같은 독살을 만들어 두고 만조 때 물이 찼다가 간조에 빠지면 그 안에 갇힌 생선을 그냥 채집해오면 된다. 지금도 체험을 진행하고 있어 관광객이 이용 중이다.


태안 해양유물전시관. 사진 이우석
태안 해양유물전시관. 사진 이우석
태안 명물 간장게장. 사진 이우석
태안 명물 간장게장. 사진 이우석

나무와 바다에 안긴 푸르른 여행지

태안 앞바다엔 곰솔숲이 있다. 구불구불한 솔숲에 서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솔 그늘 아래서 바다를 바라보면, 수정체를 통해 들어오는 수평이 들쑥날쑥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하늘을 가린 솔숲 그림자 사이로 삐져나온 봄볕 역시 무한한 평안을 주는 봄의 선물이다.

덕분에 관광 인프라도 뛰어나다. 근사한 펜션과 호텔도 많다. 주말이면 많은 이가 태안을 찾는다. 가장 유명한 꽃지해변은 일 년 내내 펼쳐지는 이벤트인 해넘이 덕에 늘 인기다. 바다만 품은 것이 아니다. ‘금상첨화’라 했나. 꽃지해변에는 거대한 꽃밭이 있고, 천리포수목원, 청산수목원 등 근사한 식물원과 숲이 있어 요즘 같은 봄날이면 더욱 빛을 발한다.

천리포수목원에 시기에 따라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은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있어 더욱 그 색이 진하고 선명하다. 다양한 야생화와 수종을 모아놓은 청산수목원은 한결 여유롭다.

거닐기 좋은 수생식물원도 있다. 날이 더워지면 자라풀, 부레옥잠, 개구리밥, 물수세미, 생이가래 등이 수표에 한가득 피어오른다. 예연원에는 국내외에서 엄선해 수집한 연과 수련 200여 종이 있다.

봄날의 태안은 걷는 여행도 좋다.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굽이치는 해변길(샛별길·바람길)이 있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이 자랑하는 트레일이다. 꽃지해변에서 황포항까지 이어지는 약 13㎞ 길(약 4시간 소요)을 걸으면 솔숲에서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품은 시원한 바람에 심신이 즐거워진다.

정죽리 안흥성에 오르면 태안 봄 바다가 보인다. 안흥성은 군사 요새였지만 지금은 바다 전망대로서 수백 년 세월 동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정죽리 안흥성은 조선 제17대 효종 6년(1655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석성이다. 성곽 일부와 성문 네 개가 남아 있는데 북문으로는 마을과 농지, 호국사찰 태국사 쪽에선 인근 관장목부터 먼바다까지 보인다. 천혜의 요새이자 관광 전망대다.

안흥성이 면한 바다는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이곳 바다에서 유물이 쏟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을 오가던 많은 무역선이 좌초했고 큰 불행은 훗날 해양 유물로 남아 후손에게 전해졌다. 인근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선 해양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고려청자를 실어나르던 태안선과 마도 1~4호선 등 태안 앞바다에서 출토한 1100년 전 고려 시대 유물을 비롯, 조선 시대 유물까지 전시돼 있다.

태안 유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단연 주꾸미가 일등공신이다. 지난 2007년 한 어선이 청자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주꾸미를 잡아 올렸다. 한눈에 봐도 고려청자. 긴급 탐사에 들어가 발견한 것이 바로 태안선이다. 이후 마도 1~4호선까지 보물선이 줄줄이 발견됐다. 발굴과 탐사를 통해 태안 앞바다가 조운로였으며 무역로, 외교 항로였음을 알게 됐다. 출토 선박에선 청자모란 연꽃무늬 주전자, 청자모란 무늬 베개 등 진기한 문화재와 함께 볍씨, 청동제 숟가락, 빗, 국자 등 생활 유물까지 나와 당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타임캡슐’이 되었다.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먹거리 태안은 풍요의 바다에서 올린 다양한 바다 먹거리가 많다. 제철 꽃게는 물론 대하, 주꾸미, 간자미, 실치, 우럭, 해삼 등 가짓수도 많다. 태안에서 대하 정도의 새우는 그저 국물 내기용이었나 할 정도다. 밥도둑의 원조 격인 간장게장은 태안이 ‘패권’을 가졌다. 달콤 짭조름한 간장에 재운 암꽃게 속에는 샛노란 알이 한가득 들었다. 밥을 비비면 세상이 제 것이다. 쪄도 맛있고 탕을 끓여도 좋다. 시원한 국물에 특유의 게 향이 서려 숟가락이 쉴 겨를이 없다. 전통 가정식 게국지는 간장게장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남은 게장 국물에 묵은 김장김치나 푸성귀를 넣고 팔팔 끓여 먹는다. 짭조름하고 새콤한 맛이 침샘을 누른다. 솔밭가든이 잘한다.

우럭젓국이 기막히다. 탕거리로 이름난 우럭을 꾸덕꾸덕 말렸으니 그 진한 맛이 더하다. 뽀얗게 우려낸 국물에 칼칼한 청양고추채를 살짝 넣고 떠먹으면 해장용으로 그만이다. 두부와 무를 넣어 한층 담백하고 시원하다. 반찬 맛도 좋은 만리포식당(읍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