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와 MP3플레이어가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빈 카세트테이프에 직접 음악을 한 곡 한 곡 녹음해 채웠다.
CD와 MP3플레이어가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빈 카세트테이프에 직접 음악을 한 곡 한 곡 녹음해 채웠다.

나는 당근마켓 애용자다. 주로 음반을 사고, 이런저런 잡다한 물건을 판다. 이곳에 올라오는 음반 중엔 아이돌 CD가 제일 많다. 아마 ‘탈덕(팬 활동을 그만둠)’한 이들이 내놓은 물건이리라. 사는 지역이 홍대 인근이다 보니 요즘 핫한 해외 뮤지션들의 LP도 종종 보인다. 나의 관심사는 이런 게 아니라 1970~90년대 한국 가요 LP와 테이프다. LP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중고가가 뛴다. 5년 전 1만원 정도에 살 수 있던 음반이 요즘은 2만~3만원씩 하기도 한다. ‘판테크(LP 레코드판을 비싼 값에 되파는 재테크)’를 하는 업자가 많아져서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어도 그나마 당근마켓에는 청정지대가 있다. 한동네에서 오래 산 분들이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할 때 우선순위로 처분하는 게 책과 음반이기 때문이다. 몇 남지 않은 맑은 어장을 찾기 위해 나는 오늘도 당근마켓에 접속한다.

물건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테이프다. 이사를 앞두고 있는지 수십 개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사진으로 매물을 보던 중 낯선 테이프가 있었다. 녹음테이프였다. 채팅으로 물어보니 중학교 때 녹음해둔 테이픈데 혹시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 내놨단다. 공테이프에 녹음하는 행위가 음악에 사춘기를 건 아이들의 의식 같던 시절이 떠올랐다.

물론 나도 그 아이 중 하나였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카세트플레이어를 받았다. 가진 테이프는 몇 개 없었다. 따라서 들을 건 라디오뿐이었다. 이미 라디오키드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친구들이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추천해줬다. 하나씩 하나씩 음악 방송을 섭렵해나갔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김광환의 ‘팝스 다이얼’을 거쳤다. 사춘기의 감성이 서서히 음악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영혁이 진행하던 ‘음악세계’에 이르렀다. 동네 형의 소개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 12시를 기다렸다. 오프닝 시그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음악을 틀었다. 일대 충격이었다.

바이올린이 날렵하게 활을 긋고 나니 강렬한 기타 연주가 이어졌다.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다 끝난 후 제목을 확인했다. 1970년대 이탈리아 밴드, 뉴 트롤즈의 ‘알레그로 & 아다지오’라 했다. 이 노래는 멀고도 먼 훗날, 갤럭시 노트 광고에 쓰이며 1990년대생들에게도 알려지게 됐다. 어쨌든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 노래를 들은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확신했다. 그것은 음악의 바다로 건너오라는 초대장이라고.

라디오에서 지나간 노래를 다시 만날 기약이 없던 시절이었다. 곁에 둘 방법은 하나, 녹음이었다. 좋은 음악이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거다 싶으면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한 곡 한 곡을 모아 60분짜리 공테이프 꽉 채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녹음의 달인이 됐다. 주변 친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열정과 노력의 결과였다.


그 시절 청춘들은 좋아하는 음악을 정성스럽게 녹음해둔 카세트테이프를 보물처럼 간직했다.
그 시절 청춘들은 좋아하는 음악을 정성스럽게 녹음해둔 카세트테이프를 보물처럼 간직했다.

첫사랑의 추억 담긴 카세트테이프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우리 중학교의 3대 미녀 중 한 명인 K였다. 그녀는 목동에 살았다. 우리 학교는 합정동이었다. 그녀를 따라 목동행 버스에 몸을 싣고 그녀가 내릴 때까지 묵묵히 지켜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물론 그녀는 나의 존재를 몰랐다.

나는 소심했다. 마지막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기란 걸 냈다. 60분짜리 공테이프 5개를 샀다. 알콩달콩한 록 발라드를 깡그리 모아 300분을 채웠다. 이건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재생목록)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날로그적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순서도 미리 맞춰놔야 하고 녹음하다가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며, 테이프 껍데기에는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일일이 곡명을 써야 한다. 어쨌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가장 큰 차이는 수고의 여부다.

운명의 그날이 찾아왔다. 가방 속에는 행여 흠이라도 날까 봐 비닐로 단단히 포장한 다섯 개의 테이프가 있었다. K는 목동행 버스에 탔고, 나도 평소처럼 마지막 승객으로 버스에 올랐다. 거사를 치르는 데 적진을 탐색하는 건 필수, 그녀의 집 앞에는 파리공원이 있었다. 그곳을 결전의 장소로 삼을 요량이었다. 그녀가 파리공원의 분수대를 지날 무렵, 성큼성큼 걸었다. 뒤를 바짝 밟았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K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15년간 발휘한 용기의 총합보다 더 큰 용기를 냈다.

“저… 저기!”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더 커졌다. 시선이 마주쳤다. K는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과연 우리 학교 3대 미녀다운 여유였다. 익숙한 듯했다. 지극히 평온했다. 여기서 말을 꺼내고 테이프를 덥석 안겨주고 뒤돌아서야 했지만, 불행히도 “저… 저기!”가 내가 가진 모든 용기였다. 입은 얼어붙었다. 몸은 마비됐다. 손은 주머니에 갇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간신히 말을 건넸다.

“홍대 가는 버스 어디서 타?”

젠장, 젠장, 젠장, 옆에 있는 분수대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연 우리 학교 3대 미녀다운 여유로, K는 말했다. 무표정하게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키며 “저어~기”라 말한 후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아무 감정도, 어떤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집으로 향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쨌든 말이라도 걸었다는 설렘이었을까.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시나리오를 첫 장조차 꺼내지 못하고 덮었다는 비통함이었을까. 환상이 있었다. 싸구려 영화에서 흔히 보듯 그녀가 나를 불러 먼저 긴장감을 풀어준다든가 ‘이대로는 안 되지!’ 마음속으로 외치며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든가 하는. 어쩌랴, 현실은 냉혹한 법이다. 하지만 15세 소년이 그런 현실 따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어떤 청춘 영화도, 하이틴 로맨스에도 현실은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인내와 추억이 담긴 테이프는 친구들의 생일 선물로 하나씩 사라져갔다.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로 좋았다. 기뻐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은 그저 씁쓸했다. 사춘기의 열정을 허무하게 소진하는 것 같았다.


잊을 수 없는 ‘첫 번째’ 고백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꽤 많은 연애를 했다. 연애라 부를 수 없는 관계도 적잖이 있었다. 그 관계의 시작은 대체로 음악으로 인해서였다.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급격히 거리가 가까워진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음악으로 마음을 사로잡으려 시도했다. 꽤 타율이 높았다. 테이프를 녹음해준 적은 없었다. 연애를 하게 될 무렵에는 이미 MP3 파일을 공 CD에 구워줄 수 있는 세상이었다. 메신저가 등장해서 파일을 전송하는 시대를 지나 카카오톡으로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보내주게 된 그 모든 시대에, 시작의 설렘이 있다.

그러나 설렘의 흔적만 남았을 뿐, 어떤 노래를 보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쉽게 음악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이라는 것, 삶의 모든 첫 경험들이 전두엽에 문신처럼 새겨지듯 꼬박 일주일을 학업을 작파해가며 만든 다섯 개의 카세트테이프가 음악으로 고백했던 첫 시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