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문어숙회, 대하구이, 맛조개무침, 서대조림. 사진 김성윤 조선일보 기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문어숙회, 대하구이, 맛조개무침, 서대조림. 사진 김성윤 조선일보 기자

프랑스를 흔히 ‘미식(美食)의 나라’라고 한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은 자국의 어느 지역을 ‘미식의 고장’으로 꼽을까. 대체로 부르고뉴(Bourgogne)라고 하면 이의가 없을 듯하다.

프랑스 동부 내륙에 있는 부르고뉴 지방은 바다는 없지만 넓고 기름진 평야와 산악지대, 강, 호수, 목초지 등 다양한 지형에서 나오는 풍성한 식재료를 바탕으로 오래전부터 프랑스 최고의 미향(味鄕)으로 자리매김했다. 프랑스 최고급 와인과 치즈, 소고기가 부르고뉴에서 생산된다. 달팽이 요리, 소고기를 와인에 푹 끓인 뵈프 부르기뇽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이 부르고뉴에서 탄생했다.

한국에서 부르고뉴와 비교할 만한 지역이 있다면 전라도일 것이다. 전라도는 부르고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지형을 품고 있다. 심지어 부르고뉴가 갖지 못한 바다까지 끼고 있다. 기름진 평야와 깊은 산, 계곡, 바다, 갯벌에서 생산되는 풍성한 식재료를 바탕으로 한국 최고의 맛 고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광주광역시는 전라도의 물자와 사람뿐 아니라 맛도 모여드는 중심이다. 그러니 비빔밥이나 불고기 등 한식의 ‘기본 과정’을 학습하고 더 높은 단계의 한식을 맛보고 싶은 외국인 비즈니스 파트너나 친구가 있다면 광주로 안내할 만하다.

광주에는 어느 한 곳을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음식점이 수두룩하다. ‘섬진강’은 최근 광주에서 방문한 식당 중에서 특히 인상에 남았다. 광주 신도심이자 가장 번화한 서구 상무동·치평동 일대인 상무 지역에서 비교적 한적한 쌍문동 한 아파트단지 앞에 있다. 섬진강과 특별히 인연이 있는 식당은 아니다. 식당 주인 최영수씨는 “예전에 ‘섬진강’이라는 재첩국(민물조개로 만든 맑은국) 식당을 오래 했고, 같은 상호(商號)를 계속 이어서 쓰고 있다”고 했다.


왼쪽부터 홍어삼합, 굴비구이, 육회, 전복찜, 전어회무침. 사진 김성윤 조선일보 기자
왼쪽부터 홍어삼합, 굴비구이, 육회, 전복찜, 전어회무침. 사진 김성윤 조선일보 기자

제철 재료로 만든 ‘일품’ 계절 음식

자리에 앉자 광어회와 육회·찰밥·김이 각각 접시에 담겨 나왔다. 찰밥은 허기를 얼른 달래라는 배려. 젓가락으로 조금 떠서 기름 바르지 않고 구운 김에 싸 먹었다. 차진 찰밥과 김의 감칠맛이 썩 어울린다. 소 우둔살을 얇게 저민 육회를 초고추장, 다진 마늘, 참기름을 섞은 양념장에 찍어 먹는다. 한우의 고소하면서 쫄깃한 식감이 매콤달콤한 양념과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한다. 광어회도 숙성을 잘 시켰는지 탱탱하면서도 씹을수록 감칠맛이 배어 나온다.

섬진강은 전통적인 의미의 한정식집은 아니다. 각종 요리와 반찬이 커다란 교자상을 가득 채우다 못해 접시 위에 접시가 포개진 한 상을 일꾼 둘이서 낑낑대며 들고 들어오는 전라도 음식점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 가지 음식이 처음에 나오고, 접시들이 비어갈 때쯤 종업원이 새로운 요리를 내온다. 전통 한정식의 한 상 차림과 서양식 코스 요리의 중간쯤 되는 형태다.

한정식집이 아니라면 이 식당은 뭐라고 수식해야 좋을까. 이 식당 간판에는 섬진강이라는 식당명과 함께 ‘계절 음식점’이라고 적혀 있다. 최씨는 “그때그때 제철인 재료를 사용하고 그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려낸다는 뜻”이라고 했다. 봄에는 병어, 여름에는 민어, 가을에는 낙지, 겨울에는 꼬막 등 전라도의 들과 산과 바다가 아낌없이 주는 식재료를 내주기만 할 뿐이라고 했다.

최씨는 자신이 “한정식이라고 할 만한 솜씨가 없는 사람”이라고 수줍게 말했다. 지나친 겸손이다. 음식에서 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 과장해서 말하면 요리사의 재능이란 좋은 식재료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알아서 확보하는 것이 절반 이상이다. 최씨는 “재료가 나는 곳을 알면 직접 받고, 모르면 잘 아는 상인에게 부탁해서 공급받는다”고 했다.

육회와 광어회 접시가 비었을 때쯤 전어회무침과 전복찜이 나왔다. 전어 하면 가을을 제철로 알지만, 기름이 너무 올라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가을 전어보다 산뜻하면서 전어 본연의 맛이 더 나는 여름 전어가 낫다는 이도 많다. 여름 전어를 양념에 가볍게 무쳤다. 전복은 씨알이 꽤 굵어 3년 이상은 양식했을 것으로 보였다. 이어 서대조림과 대하구이가 나왔고, 문어숙회와 맛조개무침, 황석어튀김이 이어졌다.

호남 음식이라면 흔히 달고 짜고 매운 진한 맛이라고 알지만, 이 식당은 재료 자체의 맛을 최대한 살릴 정도로만 양념하는 자제력이 돋보였다. 이어 나온 애호박찌개는 제철 맞은 싱싱한 애호박을 얇게 채 썰어서 돼지고기, 두부와 함께 넣고 끓였는데, 고춧가루를 넣고 소금으로만 간을 해 국물이 시원하면서도 애호박의 단맛과 두부의 담백함, 돼지고기의 고소함을 경쾌하게 살렸다.

식사는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호남 음식의 대표주자들이 줄줄이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우선 육전, 얇게 저민 소고기의 고소한 육즙과 부드러운 육질을 달걀옷으로 지켜내며 지져냈다. 함께 나온 생선전도 입안에서 포슬포슬 기분 좋게 부서졌다. 갯벌에서 잡은 뻘낙지는 확실히 야들야들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 맛이 남달랐다.

호남 특유의 음식 맛을 뜻하는 ‘개미(발효식품의 깊은 맛)’를 대표하는 음식인 홍어삼합이 마침내 등장했다. 잘 삭힌 홍어를 삼겹살과 묵은지로 감싸 입안에 넣으니 강렬한 암모니아 냄새가 입안에서 폭발하더니 코를 치고 올라온다. 얼얼하고 맵고 짜고 고소한, 강한 것들끼리 서로를 밀어올리며 맛의 조화를 극단으로 끌어올린다.

잘 구운 굴비와 쌀밥으로 식사는 마무리됐다. 대략 15가지 음식이 나왔다. 그저 가짓수를 채우거나 식탁 빈자리를 메우려는 무성의하고 무례한 음식이 하나도 없다. 하나하나 식탁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일품요리다. 그러면서도 가격은 이보다 훨씬 못한 음식으로 때우는 서울 한정식집의 3분의 2 수준. 정말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음식으로 포만감을 느끼며 식당을 나왔다.


섬진강

분위기 허름하고 소박하지만 깔끔하다.
서비스 오래 함께 일한 주인과 종업원들의 손발이 착착 맞는다.
추천 메뉴 한 상 4인 13만·16만원
음료 일반 한식당 수준이다. 와인 리스트 없다.
영업시간 오후 12~2시, 오후 5~10시
예약 권장
주차 편리
휠체어 접근성 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