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은 광기, 갓 태어난 것 같은 얼굴, 자기 헌신, 깡다구, 상대를 향한 무한한 존경 같은 이정현의 본질은 모두 ‘자기 비움'이라는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사진 파인트리 엔터테인먼트
해맑은 광기, 갓 태어난 것 같은 얼굴, 자기 헌신, 깡다구, 상대를 향한 무한한 존경 같은 이정현의 본질은 모두 ‘자기 비움'이라는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사진 파인트리 엔터테인먼트

차승원이 ‘삼시 세끼-어촌 편’에서 펄떡이는 참돔을 해체하고 장작불에 매운탕을 끓이는 동안, 이정현은 ‘신상출시-편스토랑’에서 긴 칼로 하몽(스페인산 생햄)을 자르고 토치로 불향을 입힌 만능 간장을 내놓으며 시청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하고 ‘집콕’ 생활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화구와 텃밭을 오가며 요리하는 스타들에게서 힐링을 얻었다. 어느 장소에서건 순서에 맞춰 하나씩 요리가 완성돼 가는 모습을 보는 건 얼마나 즐거운가.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전설적인 영화 ‘꽃잎’으로 주목을 받은 후, 20대를 세기말의 ‘테크노 전사’로 보냈던 이정현. 배우에서 가수로 급격한 커브를 그린 커리어 탓에, 30대에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 차근차근 ‘막노동’에 가까운 배역으로 영화계 스텝을 밟은 이정현에게 요리 예능을 권한 사람은 연상호 감독이었다. K좀비 시대의 서막을 연 영화 ‘부산행’의 감독 연상호는 ‘부산행’ 이후 4년간을 그린 속편 ‘반도’의 여전사로 이정현을 캐스팅했다. 그 자신, 애처가에 요리를 사랑하는 연상호 감독은 이정현에게 조언했다. “좋아하는 취미로 대중과 친밀해지는 것도 괜찮다”고.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인육을 뜯어먹으려 달려드는 굶주린 좀비와 싸우던 이정현은 촬영이 비는 날 집으로 돌아와 깨끗한 앞치마로 갈아입고 TV 카메라 앞에서 ‘만능 간장’과 ‘계란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극과 극의 태도는 이정현에게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3000 대 1의 경쟁을 뚫고 ‘미친 소녀’로 스크린에 데뷔했을 때부터, 순간 전압이 백만 볼트로 치솟는 테크노 전사로 노래할 때도,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엄마와 요리하며 몸과 마음의 치유를 받았다.

광기에 가까운 에너지로 ‘무당의 딸’이 아닌가 의심받던 이정현은 서울의 한 가정에서 평범한 부모를 둔 딸 다섯의 막내로 자랐다. 시끌벅적한 집안에서 자매들과 넘치도록 사랑과 우정을 지지고 볶고, 끼니마다 풍성한 집밥을 먹고 컸다. 이정현이 부모로부터 받은 최고의 예술 교육은 ‘무조건 믿어주고 억압하지 않는 것’이었다. 코로나19 와중에 개봉하는 도전적인 여름 블록버스터 ‘반도’의 제작발표회를 며칠 앞두고 이정현을 만났다.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는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이정현을 연상시킨다. 영화 속 주인공이 열심히 살수록 점점 추락하는 반면, 이정현은 계속 행운의 사다리를 탄다는 점이 다를 뿐.
“(놀라는 표정으로) 행운의 사다리라고? 그렇게 봤나? 알고 보면 나도 ‘꽃잎’으로 데뷔한 후 나이가 애매해서 활동을 못 했다. 그러다 가수 활동을 시작했는데, 한 번 무대로 가면 영화계에는 또 없는 존재가 돼버린다. 가수 활동은 이십대 초반이면 전성기가 끝나고, 열심히 해외 활동을 해도 국내에선 잊힌 채로 서른을 맞았다. 다행히 2011년 무렵에 우연히 사석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그동안 왜 연기를 안 했느냐’며 얼마 뒤 아이폰 단편 영화 ‘파란만장’에 불러줬다. 그 영화가 베를린 국제영화제 단편 부문에서 황금곰상을 받으면서 ‘이정현이 다시 연기한다’는 소문이 난 거다. 그렇게 단편 영화, 독립 영화로 시작해 다시 차곡차곡 스텝을 밟아 올라갔다.”

7월에 개봉을 앞둔 영화 ‘반도’는 ‘부산행’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연상호 감독과는 즐겁게 작업했나.
“그분은 최고였다. 연 감독은 배우라면 꼭 작업하고 싶어 하는 최상위권의 리더다. 완벽한 콘티, 본인이 샘플로 보여주는 직접 연기, 1분이 필요하면 딱 1분만 찍는 귀신 같은 효율성… 더 놀라운 건, 편집 결과를 보면 기가 막히게 장면이 붙어 있다. 슬픈 감정이면 불필요한 걸 쥐어짜지 않고, 딱 그 슬픈 연기를 건져 낸다. 오후 8시까지 예정된 촬영이 점심 전이면 끝난다.”

그 운영의 묘가 정말 궁금하군. 자신의 머릿속에서 모든 설계가 끝난 감독만이 그런 식의 효율의 리더십이 나온다. ‘군함도’를 함께했던 류승완 감독은 어땠나.
“스타일이 다르다. ‘군함도’는 역사물이고, 류승완 감독은 좀 더 엄격했다. 큰 작품이었고 풀샷이 많아,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가운데 한쪽에선 연기해야 했다. 모두가 합심해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징용 노동자를 표현하느라 황정민, 송중기씨도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체중을 뺐고, 나도 당시 몸무게가 35㎏이었다.”

늘 스크린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악바리처럼 몸을 쓰는 역을 맡아왔다. 연상호 감독은 이번 영화 ‘반도’를 위해 ‘매드맥스’의 무드를 참고했는데, 당신은 혹시 ‘매드맥스’의 여전사 샤를리즈 테론에게 영감을 받았나.
“아니. 특별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무조건 연 감독을 멘토처럼 의지하고 따라갔다. 시나리오에 나온 대로, 감독이 알려준 대로…, 모든 게 명확했다.”

16세에 ‘꽃잎’에 출연할 때는 어땠나. 장선우 감독은 1990년대 한국 영화계의 작가주의적인 마초로 유명했다.
“모든 게 무서웠다. 필름 돌아가는 소리도, 엄청난 규모의 촬영 스태프도…, 첫날부터 촬영을 접고 ‘쟤, 누가 뽑았냐?’고 화를 내셨다. 숙소로 돌아와 울면서 결심했다. ‘연기를 모르니 그냥 미친 아이로 살자’고. 다음 날부터 그냥 미쳐서 거리를 헤맸다. 불쌍해서 주민들이 데려다 씻기면 스태프가 와서 조용히 데려갔다. 돌로 그어 온몸에 상처를 내고, 머리로 유리창을 받고 기절도 했다. 백치 상태로 가서 그렇게 무식하게 했다.”

그런 식의 극심한 메소드 연기는 자아를 훼손한다. 일상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의 혼돈을 겪을 텐데.
“다행히 집에 오면 다 치유가 됐다. 언니들 덕에 집안이 늘 밝고 시끄러웠다. 엄마가 해준 된장찌개에 밥 먹으면 모든 상처가 다 아물었다.”

‘부산행’ 속편인 블록버스터 좀비 영화 ‘반도’에서 여전사 ‘민정’ 역을 맡은 배우 이정현. 예능 프로그램 ‘신상출시-편스토랑’에 출연해 요리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평소 요리·청소·정리로 스트레스를 푼다. 사진 파인트리 엔터테인먼트
‘부산행’ 속편인 블록버스터 좀비 영화 ‘반도’에서 여전사 ‘민정’ 역을 맡은 배우 이정현. 예능 프로그램 ‘신상출시-편스토랑’에 출연해 요리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평소 요리·청소·정리로 스트레스를 푼다. 사진 파인트리 엔터테인먼트

작은 몸이 뿜는 ‘깡’과 카리스마가 전도연을 닮았다고 했더니, 막대사탕을 베어 문 듯 감동적인 표정이 됐다.

“알고 보면 많은 배우가 다 악바리 근성이 있다.”

‘깡’의 기질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나.
“아버지는 성실한 강력계 형사였다. 등에 권총을 차고 다니셨고, 점심엔 동료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 밥을 먹이셨다. 보수적인 분이라 ‘혼날까 봐’ 영화 오디션도 막내 언니랑 몰래 가서 봤다. 그런데 합격 발표가 신문 1면에 나는 바람에 들켜서, 그날 아빠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아빠가 단박에 그러셨다. ‘우리 딸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구나! 서울대 들어간 것보다 더 기쁘다!’”

자긍심으로 속을 꽉 채워주셨군!
“맞다. 그래도 나는 또 고생하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아서, 가족은 촬영장에 절대 못 오게 했다. 미성년자였는데도 촬영장에 내내 혼자 있었다. 미친년 분장해서 피 칠갑 하고 돌아다니던 때라…. 그런데 어느 날 몰래 구경 온 아빠 엄마와 딱 마주쳤다. 마지막 광주 금남로 대규모 군중 신(scene)에서. 어찌나 놀랐던지, 아빠 엄마가 신문으로 얼굴을 착 가리시더라고.(웃음)”

박찬욱 감독의 ‘파란만장’ 촬영 때, 문소리 대타로 전화받고 현장에 달려가 2시간 만에 저수지에 빠진 시체 연기를 했다. 메이킹 필름을 보니, 거친 바닥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마음은 행복했다고 해서 놀랐다.
“문소리씨가 임신하는 바람에 갑자기 섭외 전화를 받았다. 현장 가서 대본을 봤는데, 무당 역할이더라. 다행히 내가 브레이크 댄스를 배워서 관절이 잘 돌아간다. 물에서 끌려 나와 엎어 치고 메쳐지며 끌려가는데 관절이 막 돌아간다고 감독님이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모형 시체보다 더 시체 같다고. 그냥 그 모든 게 꿈같고 감사했다.”

연기하는 태도가 정말 헌신적이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는 느낌마저 든다.
“간절하게 진실하게 한다. 완전히 그 인물이 되어서, 감독의 의도가 관객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대는 다르다. 내 안에 있는 밝은 리듬이 나온다. 즐겁다. 두 장르에서 다른 에너지가 나오는 게 신기하다.”

무대에서 테크노 춤을 추며 가수로 살 때는 즐거웠나.
“즐거웠다. 그때는 또 모든 콘셉트를 다 내 뜻대로 만들고 펼쳐냈다. 1집 ‘와’에서는 동양적인 무대를 꾸몄다. 그다음 ‘바꿔’에서는 여전사로, 2집에서는 이집트, ‘줄래’에서는 바비 인형, 3집 ‘아리아리’에서는 야생녀 콘셉트로 갔다. 세기말이라 다들 밀레니엄을 노래하던 때였다. 사이버 콘셉트 일색이었는데, 오히려 반대로 갔다. 아쟁 소리를 넣고, 비녀 꽂고 부채 들고, 과격한 테크노 꺾기 춤을 췄다. 작은 비녀는 안 보인다고 30㎝나 길게 뽑아서 꽂았다. 부채에는 눈동자를 그려 넣었는데, 동공이 지구였다. 내 구상은 동양적인 외계인이 지구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놀랍다! 무엇보다 신인 가수인데 콘셉트를 만드는 능력과 권한이 있었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 그렇게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음반사 회장이 첫 방송 나가고 ‘네가 한 이상한 화장에 눈동자 부채 때문에 다 망했다!’고 탄식했다. 그런데 3일 만에 난리가 난 거다. 거리 레코드점에서, 리어카에서 CD 사려고 길게 줄을 늘어섰다. 그 뒤부터 콘셉트를 모두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뭔가.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하자! 나는 설거지를 해도 음식물 망을 끝까지 다 비운다. 화장실 청소를 해도 배수구 머리카락 한 올까지 잡아낸다. 연기할 때도 능력의 최대치를 쓰려고 한다. 일단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잘 마무리하려고 한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했나.
“항상 잘되면 그다음이 슬럼프였다. 영화 ‘꽃잎’을 찍고 나서 바로 슬럼프였는데, 가수로 1집 내고 나니 또 슬럼프….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일은 잘되든 안되든 슬럼프가 자주 온다. 피가 마른다. 이겨내기 위해 나는 취미를 찾아냈다. 취미가 있으면 힘든 시간을 견딜 힘이 생긴다. 그게 요리다. 주말엔 남편과 원예농장에 가서 1000원짜리 모종을 산다. 베란다 텃밭에서 상추와 블루베리를 키우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어릴 때 엄마는 텃밭에 고추, 파, 배추… 온갖 채소를 다 심었다. 끼니때면 언니랑 바구니 들고 채소 뜯으러 갔는데, 그 심부름이 정말 좋아서 매번 콧노래를 불렀다. 커서는 매주 목요일 TV 앞에서 오후 7시 45분을 기다렸다. ‘한국인의 밥상’을 보려고. 엄마랑 둘이 앉아서, 가마솥 뚜껑에 지글지글 소리 내며 부침개가 익어가면 세상 시름이 다 잊혔다.”

사랑받을 때 행복한가. 줄 때 행복한가.
“줄 때 행복하다. 엄마가 주위에 바라는 거 없이 베푸는 모습을 보고 컸다. 그 복이 내게 왔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