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폰을 불고 있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사진 위키미디어
색소폰을 불고 있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사진 위키미디어

2015년 흑인 교회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 장례식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선창했다. 교회 지도자가 추임새를 넣고 추모객이 오바마 대통령을 따랐다. 음악이 비극도 화합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미국인은 대통령 후보 경선 때부터 정치인들에게 음악적 취향을 묻는다. 미국 대중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은 2010년부터 유력 정치인에게 음원 서비스 ‘스포티파이’로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일렉트릭 계열의 음악을 듣는다고 답했고,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팝가수 아델과 샘 스미스의 곡을 애정한다고 답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016년 대통령 선거 유세 당시 흑인 여성 싱어송라이터 니나 시몬, 북아일랜드 출신의 R&B 가수 밴 모리슨의 음악을 듣는다며, 인종 차별 논란을 반박했다. 현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은 아리아나 그란데, 배드 버니 같은 히스패닉 뮤지션의 음악을 좋아한다며 미국 내 소외계층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들이 실제로 해당 음악을 듣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일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정치인의 대중적 이미지가 좋아질 수 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은 행사 내내 음악으로 가득 찬다. 미국에서 시작한 리듬 앤드 블루스, 소울, 컨트리 뮤직을 기본으로 클래식이 액세서리처럼 행사장을 가득 채우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 때는 클래식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미국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츠하크 펄먼과 첼리스트 요요마가 실내악을 연주했다. 여기에 가브리엘라 몬테로(피아노), 앤서니 맥길(클라리넷)이 합류해 4중주를 펼쳤다.

백인·아시아계·히스패닉·흑인 음악가가 4중주를 하는 모습은 미국의 화합을 대외에 과시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도 조슈아 벨(바이올린), 샤론 이스빈(기타) 등 클래식 음악가를 백악관으로 초대해 음악회를 열었다. 오바마 부부는 “클래식 음악이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상상력을 촉진한다”고 믿었다. 이렇듯 대선 주자 시절 밝힌 음악적 취향과 무관하게 백악관 입성에 성공한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대중음악보다 클래식 음악과 음악가를 곁에 두는 경향을 보였다.

미국 2대 대통령 존 애덤스(1797~1801년·이하 재임 연도만 표기) 시절 지어진 백악관은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면서 미국 클래식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거쳐 간 장소다. 20세기에 들어와 백악관은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의 저명 음악가를 초대하기 시작했다. 미국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1923~29년)는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53~61년) 대통령은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초대했다.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권에 저항해 망명자로 떠돌던 전설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는 1961년 11월, 존 F. 케네디(35대·1961~63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01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 사진 한정호02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 당시 클래식 공연 모습. 사진 한정호03 1961년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가 백악관에서 연주를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사진 한정호
01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 사진 한정호
02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 당시 클래식 공연 모습. 사진 한정호
03 1961년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가 백악관에서 연주를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사진 한정호

음악가에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 경우도 있다. 린든 존슨(36대·1963~69년) 대통령은 텍사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을 총애했다. 클라이번은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58년, 소련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한 인물이다. 존슨 대통령은 클라이번의 우승을 ‘공산주의를 제압한 자유 진영의 승리’로 표현하며 백악관에서 연주를 청해 들었다. 1934년에 태어난 클라이번은 33대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1945~53년)이 백악관 주인이었을 때부터 44대인 오바마(2009~2017년)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절 백악관에서 연주하거나 초대 행사에 응하며 권력자들 옆에 있었다. 미국 정치인들은 민주당과 공화당 구분 없이 클라이번을 사랑했다.

대통령의 클래식 사랑은 방송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미국 공영방송 PBS는 ‘백악관 연주회’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영화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40대·1981~89년) 대통령은 스타성이 있는 성악가들로 백악관을 빛냈다. 비벌리 실스, 안나 모포, 프레데리카 폰 스타데, 제시 노먼처럼 인종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디바’ 기질이 다분한 여성 가수들이 워싱턴의 밤을 밝혔다. 또한 지휘자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 존 윌리엄스가 지휘하는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는 백악관 연주회의 단골 출연자로 등장했다. ‘아버지 부시’인 조지 H. W. 부시는 할렘 소년 합창단을, 아들인 조지 W. 부시는 흑인 음악가를 백악관에 초청했고 이들의 공연이 전파를 탔다.

대통령의 측근 중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있다.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는 클래식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3세 때부터 10대 중반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라이스의 모친은 고등학교 음악 교사였다. 콘돌리자는 ‘부드럽게 연주하라’는 이탈리아 음악용어 ‘콘 돌체자(con dolcezza)’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2002년, 미국 워싱턴의 한 시상식에서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하는 파격 무대를 갖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DC의 포토맥 강 기슭에 있는 종합 문화 시설 케네디센터는 워싱턴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다. 리처드 닉슨(37대·1969~73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일과가 끝나면 워싱턴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열리는 이곳을 즐겨 방문했다. 빌 클린턴(42대·1993~2001년) 대통령은 대선 운동 기간 TV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색소폰을 불며 화제를 모았는데, 재임 동안에는 케네디센터에서 워싱턴 내셔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