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종로구 사직로2길 17 딜쿠샤의 전경(왼쪽). 2019년 7월 10일 현재 원형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딜쿠샤. 이 공사는 2020년 7월 중 마무리될 예정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김문관 차장
2017년 12월 종로구 사직로2길 17 딜쿠샤의 전경(왼쪽). 2019년 7월 10일 현재 원형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딜쿠샤. 이 공사는 2020년 7월 중 마무리될 예정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김문관 차장

1930년대 중반 경성(현 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는 가운데 일부 지역의 신규 주택 공급이 크게 증가했다. 도성 내부 지역으로는 계동과 혜화동 일대, 도성 밖으로는 동쪽으로 현재의 창신동, 숭인동 일대, 서쪽으로는 행촌동 일대에 주택이 공급됐다.

앞선 연재에서 서울 혜화동과 창신동 일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행촌동 관련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종로구 행촌동은 신촌과 서촌(사직동) 사이의 지역으로 ‘행’ 자에서 알 수 있듯이 큰 은행나무가 있는 동네다. 이 은행나무는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도 매우 우람해 긴 세월을 견뎠다고 충분히 짐작될 정도다.

1930년대 행촌동 지역에 신규 주택이 증가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역 자체의 수준은 매우 열악했다. 조선일보 1925년 4월 1일 자 기사 ‘늘어가는 움집, 조선인의 생활’은 오막살이도 아니고 움집살이가 늘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사람들이 오두막처럼 작고 허름한 집을 지어 사는 것이 아니라, 산기슭 땅을 파고 들어가 움집을 지어 살 만큼 주거 상황이 처참했다. 1920년대 이후 경성이 산업도시화하면서 지방 유민들이 경성으로 몰려들게 됐고, 일부 하층민들이 행촌동을 포함한 서대문 일대 산기슭에 움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열악한 주거환경은 사회문제로 인식됐다. 경성부는 움집과 토막집을 지속적으로 철거했다. 그런데 1938년 10월 6일 조선일보 기사 ‘행촌정과 현저동 합동 풍기문란 단속’은 매우 흥미로운 행촌동의 모습을 소개했다. “산등성이에 집이 하나 있는데, (그 밑) 중턱에는 게딱지 같은 집(아주 작고 초라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누구나 빈민가라는 인상을 가지게 한다. (중략) 이 두 동 세대수는 약 3500세대로 2만여 주민이 살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행촌동 산중턱까지는 아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산등성이에 커다란 저택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주소로 종로구 사직로2길 17인 이 대저택에 대해서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누가 거주했던 집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래된 2층 벽돌 양옥이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정초석에 새겨진 ‘DILKUSHA(딜쿠샤) 1923’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해 문화재 지정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이 지나서야 이 저택의 원주인을 알게 됐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살던 브루스 테일러는 조선에서 오랜 기간 거주했던 그의 부모(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이야기를 영화화하고자 했다. 그는 부모가 조선에 살았던 시기의 거처를 확인하고 싶었고, 샌프란시스코 한국 총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에 전달됐고, 최종적으로 협회 회원이던 김익상 서일대 교수가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브루스 테일러가 ‘임진왜란 때 장군이 심은 은행나무 옆’에 주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기에, 이순신 장군이라는 추정하에 충무로와 필동, 장충동 일대 외국인 가옥을 검토했다. 그러나 부친의 주택을 찾을 수 없었다. 생각을 바꿔 은행나무를 의미하는 ‘행’을 토대로 행촌동 일대를 살핀 후에야 마침내 브루스 테일러 부모의 저택이 행촌동 소재 딜쿠샤임이 밝혀졌다.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을 뜻하는 딜쿠샤는 경성에서 다양한 사업(영화 배급과 자동차, 축음기 등 상품 판매업)을 한 앨버트 테일러 부부가 건설하고 거주했던 주택이다. 상당히 넓은 대지 위에 들어선 2층 양옥 주택으로 건축적으로 의미가 있으나, 딜쿠샤가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앨버트 테일러의 행적 때문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1875년 미국 네바다주에서 출생했고, 평안북도에서 금광을 운영하는 부친(조지 테일러)을 돕기 위해 1897년 조선으로 오게 됐다. 1897년 결혼 후, 1923~24년 딜쿠샤를 건축했고 1942년 일제에 의해 조선에서 추방당하기 전까지 딜쿠샤에 거주했다.

그는 조선에 끝까지 남았던 13인의 외국인 중 한 명으로 추방 전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으며, 아내 메리 테일러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저택에 있으면서 음식을 구하기도 힘든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사업가 신분으로 일제에 저항

그는 사업가지만 조선에서 상당 기간 거주했기 때문에 AP통신의 특별통신원으로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송고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특별한 사건은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물론 3·1운동을 해외에 알린 인물이 앨버트 테일러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전문 저널리스트가 아닌 인물이자 큰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가 일제에 반하는 사건을 외부에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알린 과정은 그의 가정사와도 연결된다. 1919년 고종 황제의 승하로 온 조선이 들끓고 있는 와중, 세브란스병원은 3·1운동을 준비하던 기독교 측의 기지 역할을 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은 현재의 신촌이 아닌, 서울역 앞에 위치했다. 독립선언서를 기차를 통해 지방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등사한 다량의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세브란스병원에 보관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28일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메리 테일러는 당시 상황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나는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국방색 군복을 입은 일본 군인들이 병원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거리에는 흰옷 입은 한국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나와 있었다. (중략) 그날 우리 아들이 태어났다. 의식이 반쯤 돌아온 상태에서 나는 병원에서 커다란 동요가 일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문들이 열렸다 닫히고 귓속말과 고함소리,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발끝을 들고 조심조심 걷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어느 순간 눈을 떴더니 간호사가 아기가 아니라 종이 뭉치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그 서류를 내 침대의 이불 밑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바깥 거리도 온통 소란스러웠다. ‘만세, 만세’ 하고 외치는 커다란 함성이 계속 반복됐다. ‘만세’ 소리는 거의 포효와 같았다.”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들이 독립선언서를 메리 테일러 침상 밑에 숨긴 것이다. 이를 앨버트 테일러가 발견한 후, 미국과 해저전신망이 연결돼 있는 일본으로 그의 동생 윌리엄 테일러를 보내 이 소식을 미국에 타전하게 했다. 윌리엄 테일러는 구두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출국했고, 이 소식은 뉴욕타임스를 통해 미국에 알려지게 됐다.


▒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원장, 공유도시랩 디렉터, 금융위원회 금융발전심의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