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 디렉터 정구호. 그는 현재 삼성의 ‘빈폴’과 롯데백화점 본점 공간 리뉴얼을 동시 진행 중이다. 제이에스티나의 부사장 겸 CD이자, 현대홈쇼핑의 제이 바이, 코스맥스의 화장품 제품 개발도 맡고 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만능 디렉터 정구호. 그는 현재 삼성의 ‘빈폴’과 롯데백화점 본점 공간 리뉴얼을 동시 진행 중이다. 제이에스티나의 부사장 겸 CD이자, 현대홈쇼핑의 제이 바이, 코스맥스의 화장품 제품 개발도 맡고 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다채로운 공간에서 정구호를 만나면서 적잖이 혼란에 빠졌다. 어떤 날은 트레이닝 슈트에 캡 모자를 쓰고 휠라 프레젠테이션을 진두지휘했고, 어떤 날은 서울패션위크 총감독으로 프런트 로(front row·패션쇼 맨 앞 중간의 VIP석)에 앉아 있었다. 어떤 날은 올림픽공원 야외무대의 눈부신 조명 아래서 오페라 세트를 점검하고 있고, 어떤 날은 한국의 공예 장인들과 나전칠기를 설명하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유통 마켓의 최전선에 있는 삼성, 롯데, 휠라, 제이에스티나 등 대형 기업은 물론 국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대표적 문화기관(국립무용단, 공예진흥원 등)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정구호를 디렉터로 호출하는 이유는 뭘까(도중 하차하긴 했지만, 그는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공동 총감독이기도 했다)?

나는 정구호의 이 모든 행보가 그가 지닌 핵심 기술인 ‘정리의 기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르의 디테일 속에서 뭉텅뭉텅 특징을 찾아내고, 순식간에 그 관계를 정리해내는 힘! 10년간 일하던 제일모직에서 나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정구호. 브랜드 ‘빈폴’ 리뉴얼을 명목으로 다시 한 번 삼성의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선 당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만났다.


밀라노디자인위크에서 열린 ‘2019 한국 공예의 법고창신’ 전.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밀라노디자인위크에서 열린 ‘2019 한국 공예의 법고창신’ 전.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정구호가 만지면 왜 모든 게 제자리를 찾고 말끔하게 정리될까.
“다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그 늘어놓은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자가 미니멀리스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는 것.”

대기업의 패션과 공간 설계부터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연출까지…이 모든 게 대체 한 사람이 소화 가능한 영역인가.
“나는 사무실도 없이 혼자 일한다. 노트북이 내 사무실이다. 패션과 패션 아닌 것으로 분류해 스케줄 조정을 해주는 재택근무 직원만 있다.”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다.
“컨설팅의 핵심은 정확한 답을 내는 거다. 만약 내가 정확한 답을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 조사하고 컨펌하고 수정하는 일은 시간 낭비다. 리서치, PPT 작업, 각종 구글링까지 전부 내가 한다. 도면을 그린다거나 하는 일만 외부 전문가에게 맡긴다.”

지난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한 ‘2019 한국 공예 법고창신’ 전시는 정말 놀라웠다.
“큰 덩어리로 한국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책가도(冊架圖)라는 한국의 대표 그림을 입체화해서 투명 사방 책자로 틀을 짜고 그 안을 블랙과 화이트로 채웠다. 수묵화 느낌을 큰 정서로 잡고 갓, 방짜 유기, 나전칠기, 반상 등 공예품을 그 안에 콤비네이션해 봤다.”

연출했던 한국 무용 작품 ‘묵향’ ‘향연’과 같은 맥락으로 보였다.
“맞다. 여러 장르의 일을 번잡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겐 하나의 일이었다. 다양한 형태와 컬러로 어지러운 오브제를 나만의 시각으로 정리해서 간결하게 보여주는 일.”

핵심 빼고 다 버리는 방식…곤도 마리에를 보는 것 같았다.
“수묵이라는 주제를 정하면, 그 느낌에 맞는 것만 공간 안으로 들여놓는 거다. 전통문화는 하나하나가 다 정말 좋은 요소지만 한꺼번에 보여주면 산만해진다.”

오페라 ‘동백꽃 아가씨’는 컬러풀한데도 어지럽지 않았다.
“오방색이라고 하면 색이 혼합된 거로만 생각하잖나. 치마, 저고리, 고름… 그런데 색동옷을 그대로 보여주면 매력적이지 않다. 빨강, 초록, 노랑… 색을 분리해서 한 번에 하나씩만 보여주고 그럴 때조차 배경을 단순화해야 한다.”

사이즈 큰 덩어리로 구획을 잘하는 건 정구호식 디자인의 특징인 듯하다. 공간과 사물의 관계를 좀 묵직하게 조정한달까.
“일단은 핵심을 잡고 그다음엔 아이솔레이션(isolation·고립)을 중요한 장치로 쓴다. 특정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사물을 개별적으로 고립시켜 놓으면 굉장한 변화가 생긴다. 그것도 일종의 정리 기법이다.”

순식간에 핵심을 당겨 보는 시력이 필요하겠군.
“나만의 필터다(웃음). 나는 문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역사와 전통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사람. 둘째, 전통과 상관없이 새로운 창작을 하는 사람. 셋째, 나처럼 옛것을 요즘 시대에 맞게 재조명하는 사람.”

2015년, 휠라의 부사장으로 들어가 브랜드를 리뉴얼할 때도 로고 사이즈를 키워서 존재감을 증폭시켰었는데.
“당시 내가 짚었던 문제점은 휠라의 헤리티지 로고가 너무 헤프게 쓰인다는 거였다. 그래서 로고를 쓸 수 있는 패션 라인을 줄이고, 색깔도 분명하게 정리했다. 그랬더니 40~50대만 오던 매장에 젊은이들이 몰려오면서 스트리트 무드가 형성됐다. 다행히 휠라가 그 뒤로 젊은 브랜드로 거듭났다.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여러 회사의 브랜드 리뉴얼에 관여하고 있는데.
“삼성물산 빈폴, 롯데백화점 공간 리뉴얼, 현대홈쇼핑의 패션 브랜드 J BY, 제이에스티나의 주얼리와 가방, 코스맥스의 화장품 제품 개발….”

그 정도면 머릿속 칸이 뒤죽박죽되지 않나.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 섞이면 그만둬야 한다.”

몇 년 전 제일모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그만뒀을 때는 불화설에 ‘잘렸다’는 말까지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다시 삼성의 구원투수로 등판한다는 건 매우 상징적이다.
“2003년부터 10년 7개월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다 그만뒀다. 대기업에서 받는 대우를 포기하고라도 50대 초반의 시간을 자유롭게 쓰고 싶었다. 회사를 나온 덕분에 무용, 개인 전시, 기업 컨설팅을 왕성하게 할 수 있었다. 패션뿐 아니라 요즘 모든 산업이 다 어렵다. 새로운 흐름에 맞는 확실한 결과물을 내야 하니 검증된 사람을 선택한 거다. 삼성뿐 아니라 내가 관여하는 모든 회사가 모두 내 크레디트다. 다 표가 나도록 하고 싶다.”

롯데백화점도 맡았다. 백화점이 유통의 황태자이던 시절은 지났는데, 당신만의 묘수가 있나.
“세대 간의 갭을 줄이고 길거리 문화를 흡수해야 한다. 롯데와 현대, 신세계의 삼파전에서 롯데만의 특수성을 추출해 새롭게 연출해볼 생각이다. 유능한 컨설턴트라면 리스크를 최소화한 상태로 솔루션을 제시해야 한다.”

정구호의 히트 상품은 뭐라고 생각하나.
“구호, 르베이지, 휠라.”

당신 안엔 대체 몇 명의 정구호가 사나.
“내가 결혼을 안 했잖나. 사람도 잘 안 만나고 아이 키우느라 진을 빼지 않으니 남들보다 시간이 많다.”

영향력이 오래 유지되는 건 시대를 잘 읽어서인가.
“오래간다는 건 트렌드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현대홈쇼핑에서 J BYE라고 내 패션 브랜드를 내고 있는데, 그것도 트렌드보다는 퀄리티가 우선이다. 트렌드 리스, 시즌 리스는 좋은 상품의 기본이다. 진정한 가치는 유행과는 상관이 없다.”

미니멀 앤드 아방가르드라는 취향은 여전한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미니멀’이 되고, 거기서 혁신적인 태도를 취하니까 아방가르드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작업도 다 비슷한 방식이다. 기본(basic)을 찾은 다음, 미래를 예측해서 그 흐름에 맞게 약간의 새로움을 얹는 거다.”

정구호만의 셈법이 있을 듯한데.
“내 계산법은 1+1=2가 아니다. 1+1=3이 되는 길을 찾는다. 꼭 돈의 문제는 아니다. 당장 돈 버는 건 쉽다.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게 어렵다. 가치가 없으면 생명력이 유지되지 않고, 생명력을 잃으면 브랜드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지금도 3초 안에 그림이 떠오르나.
“가끔 5초가 걸리기도 한다(웃음). 일을 제안받을 때 5초 안에 그림이 또렷하게 떠오르면 그 일을 한다. 현재, 환경, 요구… 이 세 가지를 기본으로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답을 모르는 거다. 떠오른 그림으로 방향을 잡고 디테일하게 그린 후, 최종적으로 실현하는 게 내가 일하는 루틴이다.”

당신이 그린 그림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나.
“디렉터라면 정답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보통 디렉터들은 스태프들에게 R&D(연구·개발)를 시키고 그중에 하나를 초이스하는데, 나는 처음부터 정답을 던진다. 그리고 첫 미팅 때 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고수하는 편이다. 함께 일하는 분들은 ‘디렉션이 이렇게 일관된 사람은 처음 봤다’고들 한다.”

자칫 ‘나만 옳다’는 자기중심주의로 흐를 수도 있을 텐데.
“모든 일의 솔루션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나는 내가 하려는 걸 윗사람에게든 아랫사람에게든 오십 번도 백 번도 더 반복해서 친절하게 설명할 수 있다. 쉽게 이해할 때까지. 결과는 두 가지다. 설득당하거나 설득시키거나. 설득당하면 깨끗이 승복하는 편이다. 목표 설정이 같으면 함께 갈 수 있다. 실행하도록 윽박지르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늘 앞서가는 사람인데, 방향성에 혼란을 느낄 때는 없나.
“삼성에서 나와서 공연과 전시를 하는 도중에 잠깐 어지러웠다. 패션이, 커머셜 디자인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더라. 그 답을 길거리에서 찾았다. 골목에 있는 작은 가게들, 모여드는 젊은이에게서 희망을 봤다. 그동안 나는 메인스트림에서 큰 것을 만들어왔는데, 이젠 외진 곳의 작은 움직임들이 더 중요해졌다.”

그 흐름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나는 항상 조합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이젠 단순히 콤비네이션이 아니라 진정한 컬래버레이션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느낀다. 이걸 분석만 하면 늦다. 그곳에 가서 있는 그대로 느끼고 내 생활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그 장소에서 먹어 보고 사 보고 경험해야 안다. 삼성에서 나와 거리에 가 보고 알았다. 쇼핑은 온라인에서 90% 이뤄지고 오프라인은 경험의 장소라는 걸. 스트리트와 접속해야 한다는 걸.”

정구호 시즌2는 어떻게 펼쳐질까.
“여러 가능성을 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영화다. 미스터리 스릴러풍의 시놉시스를 써놨는데, 언젠간 감독을 꼭 해보고 싶다. 내가 올해로 56세다. 여전히 미래는 모르겠다. 무계획이 나의 유일한 계획이다.”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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