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젤 샤프란의 사진집 ‘전화하는 루스’ 표지. 사진 김진영
나이젤 샤프란의 사진집 ‘전화하는 루스’ 표지. 사진 김진영

유튜브가 주요 1인 미디어 채널로 자리 잡으면서 최근 이와 관련된 소식이 많이 들린다. 유튜버 가운데는 정보량이 많은 콘텐츠를 제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일상을 소재로 한 일명 브이로그(Vlog·비디오와 블로그의 합성어)를 올리는 이들도 많다. 강아지와 산책할 때마다 찍은 영상이나 공부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담은 영상 등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은 일상을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라 정의한다. 일상은 반복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가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한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행동, 일터에 나가기 위해 같은 버스를 늘 같은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행동, 늘 같은 소파에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행동 등 우리는 삶의 많은 시간을 ‘일상적으로’ 보낸다.

일상은 지겨울 수도 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소중한 시간일 수 있다는 점을 1964년생 영국 작가 나이젤 샤프란(Nigel Shafran)은 보여준다. 그가 사진에 담는 소재는 대부분 그가 사는 집에서 출발해 그의 일상 공간 어딘가에서 멈춘다. 설거지를 마치고 건조대에 놓여 있는 식기를 찍은 ‘워싱 업(Washing-up)’ 시리즈(2000), 수퍼마켓 계산대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계산을 기다리며 쌓여 있는 물건을 찍은 ‘수퍼마켓 체크아웃(Supermarket Checkouts)’ 시리즈(2005), 영국 런던 패딩턴역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옆모습을 담은 ‘패딩턴 에스컬레이터(Paddington Escalators)’ 시리즈(2009~2010) 등 그는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평범한 행위와 장면에 시선을 둔다.

일상성에 관심을 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가장 주된 피사체는 그가 사는 집과 그의 가족이다. 영국의 사진 잡지 ‘브리티시 저널 오브 포토그래피(British Journal of Photography)’ 기자 다이안 스미스는 2015년 나이젤 샤프란을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런던 북부에 있는 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나는 곧바로 그의 파트너이자 사진의 주된 피사체인 루스를 알아보았다. 조금 자라긴 했지만 아빠(나이젤 샤프란)의 사진에서 본 그의 아들 레브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인터뷰는 ‘플라워스 포(Flowers for…)’ 시리즈를 통해 익숙한 그의 부엌에서 진행됐다.”

물론 일상을 담는 작가가 나이젤 샤프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평범한 물건이나 장면은 작가의 카메라를 통과하면서 아름다운 구도와 빛으로 미화돼 표현된다. 그런데 나이젤 샤프란의 사진은 대상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을 담는 카메라의 시선이 (대상을 미화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의 시선과 비교적 일치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사진은 수직이나 수평 같은 구도에 대한 계산에서 자유롭고(수직, 수평이 맞지 않는 사진이 많다) 적정한 노출값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편이다(어둡게 찍힌 사진이 많다).


나이젤 샤프란의 사진집 ‘전화하는 루스’에 담긴 사진들. 사진 김진영
나이젤 샤프란의 사진집 ‘전화하는 루스’에 담긴 사진들. 사진 김진영

나이젤 샤프란의 ‘전화하는 루스’ 역시 그렇다. 아내 루스가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전화하는 모습만을 담은 이 사진집은 2012년 네덜란드 출판사 로마 퍼블리케이션스(Roma Publications)에서 출간됐다. 거실, 침실, 차고, 부엌 등 집 안 곳곳에서 루스는 전화통화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을 한다. 루스의 모습은 때로는 초점이 맞지 않게 담기기도 하고, 빛이 부족한 차고에서 찍힌 사진에서는 어두컴컴해 잘 안 보이기도 하며, 눈을 비비는 중이라 예쁘지 않은 모습이기도 하다. 전화하느라 서 있는 루스의 발이 찍혀 있기도 한데, 나이젤 샤프란은 우리가 서서 남의 발을 볼 때의 각도 그대로 사진을 ‘볼품없이’ 찍었다. 대상에 개입해 더 멋지게 표현하려는 욕망을 최소화한 결과, 이 사진들은 일상에 더 가까워졌다.

이 사진집은 이게 전부다. 책의 제목대로 전화하는 루스의 모습이 전부인 것이다. 그런데 특별할 것 없이 누구나 하는 행위인 전화를 하는 루스의 모습이 1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펼쳐진다는 것이 이 사진집을 더욱 감동적으로 만든다. 유선 전화기를 든 젊고 귀여운 루스의 사진에서 시작해, 루스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무선 전화기를 사용하게 되며, 임신해서 배가 부르고, 아이가 태어나 병실에서 전화하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 사진들은 실제로 나이 먹고 변화해가는 현실의 루스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

영화 이론가 앙드레 바쟁은 그의 유명한 저서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이미지의 본질을 현실과의 관계에서 찾는 리얼리즘 미학으로 본다.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에세이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그는 사진의 본질을 현실과 밀접성에서 찾는다.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되고 카메라를 통해 자동 생성되는 사진은 다른 매체와 달리 실제와 긴밀한 유대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쟁에 따르면 사진에 담을 수 없는 현실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성이다. 현실에서는 흘러가는 시간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는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바쟁은 ‘사진에는 없지만 영화에는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을 재생산하는 능력’이라 말한다. 영화는 현실을 담아내는 사진적 본질에 기반을 둔 데 더해, 실제 우리의 삶처럼 지속되는 시간을 표현함으로써 삶과 더욱 완전하게 동일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영화만이 시간을 담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화하는 루스’처럼 한 인물을 오랜 기간 찍은 사진 시리즈는 비록 현실이나 영화에서처럼 ‘흐르는 시간’은 아니지만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한 장의 사진은 찰나를 봉인할 뿐이지만, 실제로 긴 기간에 걸쳐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은 찰나를 모은 긴 시간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실험적이고 현란한 디자인과 형식으로 새로움을 보여주는 사진집들이 많다. 하지만 ‘전화하는 루스’는 사진이 찍힌 시간의 순서라는 굉장히 단순한 흐름을 따른다. 그 덕분에 첫 장부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10년의 세월이 압축돼 전달된다. 소박한 형식이더라도 주제와 잘 맞아떨어질 때 미덕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