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까지 열리는 ‘자화상自畵像- 나를 보다’ 전시 전경. 사진 예술의전당
4월 21일까지 열리는 ‘자화상自畵像- 나를 보다’ 전시 전경. 사진 예술의전당

우리가 보는 신문 한 장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케이옥션의 3월 경매에는 1989년부터 1909년까지 조선에서 발행됐던 신문 50여 점이 추정가 2300만~5000만원에 나왔다.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조선 정부의 도움을 받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뿐만 아니라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난 이후,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1921년 11월 26일 자 ‘독립신문’도 포함돼 있다.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특별 경매품들이다. 이번 경매에서는 백범 김구를 비롯,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의 글씨와 의암 유인석 등 14인의 의병들이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보낸 편지들도 공개된다. 순국선열들이 탑골공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100년이 지난 오늘의 신문은 어떤 역사와 가치로 기록될까.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라던 초등학교 시절의 굳건한 다짐과는 달리(지금 와서 생각하면 다소 살벌하게 느껴지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2007년 이후 그 문장이 변경됐다) 내 한 몸 챙기기도 바쁜 현실이지만, 올해 3월만큼은 나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필요할 것 같다. 공익을 추구하는 언론뿐만 아니라 주차 딱지 하나에 나라를 원망하는 평범한 우리 역시 말이다. 마침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관련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미세 먼지를 뚫고서라도 한 번쯤 가 볼 만한 전시들이다.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박물관에서는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이 열리고 있다. 간송 전형필은 문화보국과 구국교육을 위해 일제에 맞선 우리 문화재의 수호자다. 당대 최고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의 미술경매주식회사 ‘경성미술구락부’ 등을 통해 헐값에 해외로 유출되던 고미술품을 필사적으로 수집해 우리 민족의 유산과 그 속에 깃든 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도굴을 당해 일본인의 손에 있던 명품 고려청자를 다시 사들이기 위해 당시 기와집 20채 가격에 해당했던 2만원의 거금을 들인 간송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 고려청자가 바로 국보 제68호로 등록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술이나 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된 매병 중에서 손꼽히는 걸작이다.

간송의 생애를 조명하고 그가 보존한 문화재를 공개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이 진귀한 고려청자를 비롯, 아름다운 우리의 보물들을 만날 수 있다. 간송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 사상 최고가인 1만4580원에 낙찰받았다는 국보 제294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도 꼭 봐야 한다. 입이 좁고 어깨가 부풀어 오른 매병과 달리 이 조선백자는 목이 길고 달항아리처럼 아래가 둥글다. 각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이런 도자기는 직접 봐야 그 오묘한 빛깔과 섬세한 무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1937년 일본에 거주했던 영국인 청자 수집가로부터 인수한 원숭이 모형의 귀여운 연적도 전시된다.

교육자로서 간송의 발자취도 볼 수 있다. 간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 사학으로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을 주도한 보성학원이 어려움에 처하자 이를 인수했으며, 자신의 스승이자 민족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한 오세창 선생의 뜻을 새기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필사했다. ‘대한콜랙숀’의 일부로 이 친필 독립선언서도 전시에서 공개되는데, 보성학원의 학생들은 광복 후 매년 졸업식이 열리는 3월 1일 이를 낭독했다고 한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만해 한용운의 ‘3·1독립운동 민족대표들의 옥중 시’. 사진 예술의전당
이번에 최초 공개된 만해 한용운의 ‘3·1독립운동 민족대표들의 옥중 시’. 사진 예술의전당
1944년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감옥에서 남긴 ‘묵란도’. 사진 예술의전당
1944년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감옥에서 남긴 ‘묵란도’. 사진 예술의전당

만해 한용운 옥중 시 최초 공개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서화미술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3월 1일 개막한 ‘자화상自畵像- 나를 보다’전(展)은 독립운동을 위해 애써온 이들이 남긴 글씨와 그림, 사진 등의 예술적 흔적을 통해 조선과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수립까지 지난 역사를 돌아본다. 특히 만해 한용운의 육필 원고는 주목할 만하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던 한용운이 일본인 검사의 요구에 따라 옥중 독립선언문,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작성했다. 그 내용은 ‘조선 독립의 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어 꽤 알려져 있으나 실제 그 원고가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같은 기간 수감 생활을 했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옥중소회를 한용운이 종이에 먹으로 기록한 ‘3·1독립운동 민족대표들의 옥중 시’의 존재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전시장에는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근대 인물들의 친필과 함께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서화미술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시·서·화(詩書畵)는 곧 우리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글과 그림에는 나라를 잃은 이들의 절절한 슬픔과 오욕의 순간, 독립의 염원이 묻어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조선총독의 암살을 계획했던 김상옥 열사의 최후의 순간을 목격한 구본웅의 생생한 펜화 작품, 만주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한 우당 이회영의 ‘묵란도’와 1944년 1월 6일 이육사가 감옥에서 남긴 ‘묵란도’가 그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히 흘러가는 자연과 반복되는 일상을 담은 작품들도 있다. ‘자화상自畵像- 나를 보다’전은 그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담담히 직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글과 그림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땅에서 활동했던 일본 화가들을 통해 근대 한국 서화 미술의 흐름을 살펴보고, 분단으로 인해 한국 미술사에서 사라진 월북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조명한다.

몇 년 전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재개관 기념전에서 만났던 미술가 최정화는 “현대 미술과 서(書)는 씨와 열매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모든 예술의 뿌리가 서라는 것이다. 상형문자를 비롯한 각종 서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또 보면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그는 “아무도 모르게 서의 설계도를 훔쳐 설치 미술을 하고 있었다”며 ‘서書로 통일統一로, 통일아!’ 전시의 아트디렉터를 맡은 이유를 밝혔다.

서뿐만이 아니다. 문자도, 책가도(민화의 하나로 책, 부채, 향로, 도자기 등을 그린 그림)와 같은 조선 궁중화와 민화 걸작 역시 오늘날 여러 분야에 예술적 영감을 주고 있다. 뉴트로의 유행과 함께 옛것에 대한 관심이 많은 요즘은 이러한 고전이 트렌디한 인테리어나 패션 화보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정신이 깃든 문화재를 지킨다는 건, 곧 미래의 우리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비장한 각오로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지 않아도, 위험을 무릅쓰고 국보를 지키지 않아도 2019년의 한국에서는 어디에서나 우리의 문화를 만날 수 있다. 그저 찾아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어쩌면 이건 평범한 우리가 나라를 위하는 가장 우아한 방법 아닐까.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