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길이가 58.3㎞에 이르는 호미곶 해상둘레길. 사진 이우석
총길이가 58.3㎞에 이르는 호미곶 해상둘레길. 사진 이우석

봄비를 맞아 보니 이젠 이견 없이 봄이다. 주저하지 않고 포항으로 향했다. 어라? 다들 꽃소식 기다리며 남쪽으로 갈 텐데, 동해안이라니. 봄 흔적을 노획하러 남쪽으로들 몰리지만 의외로 봄은 무조건 북향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여행 글을 쓰는 이들은 항상 지역과 소재에 곤궁하게 마련이다. 포항 바다가 이미 봄색을 띠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서슬 퍼렇던 동해 칼바람도 한물갔다. 서둘러 서울을 빠져나왔다.

동해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돌출돼 있는 포항 호미곶. 도착해 보니 정말 영일만에 포근한 기운이 머무르고 있었다. 해가 일찍 뜬다고 봄이 더 빨리 올 리는 없다. 육지에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흘러들어 이곳에만 고이는 것도 아니다. 진짜 봄이 한반도 사방에서 동시 상륙을 서두르고 있었나 보다.


원효·혜공 설화 깃든 오어사도 인기

밋밋한 해안선에 절묘한 포인트인 호미곶에 해상둘레길이 있다. 구룡포 동해면 입암리. 도구 해변에서부터 출발해 호미곶을 돌아 장기면에 이르는 길이다. 새파란 바다를 빙 둘러 돌아오며 땅과 바다 위를 번갈아 걷는 길이다. 총길이가 무려 58.3㎞에 이른다.

입암리에서 걷기 시작하면, 오른쪽 옆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왼쪽엔 우뚝 선 기암괴석, 아래로는 쪽빛 봄바다가 펼쳐진다. 봄나들이 코스로 제격이다.

입암리는 특이하게도 동해안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명색이 영일만(迎日灣)이니 해돋이는 당연하겠지만 서해로 떨어지는 일몰은 ‘곶(串)’ 지형에만 허락된 특혜다. 동해면 입암리 선바우에서 마산리 하선대 앞까지 700m를 걸었다.

시작부터 절경이다. 우뚝 선 바위가 마중 나왔다. 국내에 많은 해안길이 있지만 이만한 풍경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해안 둘레길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걷게 돼 있는데, 이곳은 반대다. 구간구간 바다 위로 놓인 데크길을 걸으면서 바다가 아닌 해안 절벽과 기암괴석을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즐긴다.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호미반도다. 얼마나 기괴한 형상이 많겠나. 선바위에서 바다로 툭 튀어나온 절벽지대를 돌아 지나면 수많은 형상의 바위를 감상할 수 있다. 사투리로 하얀색 언덕인 ‘힌디기’부터 마치 거대한 고릴라처럼 생긴 것도 있다. 선녀가 내려온다는 하선대(이날은 없었다)도 지척이다. 아래를 보면 수중 섬이 그대로 투영돼 보인다. 하선대 쪽 바다에는 물속 절벽이 보인다. 몰디브처럼 ‘천연 수영장’으로 딱이겠다.

봄 바다가 선물한 이른 바람에 도시에서 묻혀온 홍진을 말끔히 씻었다.

호미반도에는 볼거리와 즐길거리도 톡톡 튀어나온다. 호미곶 해맞이 공원은 워낙에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모여 살던 구룡포항 일본 가옥 거리도 가깝다. 남쪽 운제산엔 천년고찰 오어사도 있다. 오어사(吾魚寺), ‘내 물고기’란 뜻인데, 재미난 설화가 전해진다.

원효와 혜공, 두 법력 높은 스님들이 산세 좋은 운제산(雲梯山) 물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놀았다. 실컷 물고기를 먹다가 누군가 먼저 말했다. “살생을 했으니 어쩌지요?” 다른 스님이 대꾸했다. “도로 살려내면 되지요.”

뜻하지 않게 신통력 내기를 하게 된 두 고승은 나란히 물가에 앉아 ‘큰일’을 봤다. 정말로 아까 먹은 물고기가 나와 떼 지어 헤엄을 쳤다. 물고기를 가리키며 두 스님은 서로 자기가 살려낸 물고기라고 우겼다. 그 자리에 절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오어사’라 했다고 한다.

포항 시내에서 오천읍 쪽으로 가는 길을 끼고 고불고불한 산길을 오르면 운제산이 나온다. 높은 봉 아래 저수지(오어호)가 휘돌아 나가는 물가에 오어사가 숨어 있다. 절묘하고 기이한 산세 품에 싸인 절집은 이제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불국사 말사인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한 오랜 절집이다. 신라 4대 조사(원효·혜공·자장·의상)가 수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보통 절집과는 달리 일주문이 물가 쪽으로 나 있다.

경내에는 고색창연한 대웅전을 비롯한 당우(堂宇)가 여러 채 남아 있는데 빛바랜 기둥과 서까래가 아주 멋지다. 이제 봄꽃이 피어나 빛바랜 고찰에 채색을 할 태세다.

절 뒤편으로 오르면 자장암이 나온다. 30도 이상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하지만 자장암에선 계곡과 주변 산세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현수교(원효교) 너머 깊은 계곡 속엔 원효암이 있다. 물가를 낀 아기자기한 풍경이 좋아 신도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포항 북부시장의 별미 ‘등푸른생선 무침회’. 사진 이우석
포항 북부시장의 별미 ‘등푸른생선 무침회’. 사진 이우석

볼거리와 휴식 동시에 만끽

어업 기지인 구룡포항을 갔다. 항구 뒤편엔 근대역사문화지구가 있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이라 불렀던 일제강점기 일본식 주택이 모여 있는 곳이다. 목조 가옥이 그저 늘어서 있는 곳은 아니다. 따끈한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도 있고 의복 등 문화 체험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봄 조업을 준비 중이라 한창 바쁜 어선 사이를 기웃기웃대다 유명한 국숫집에 가서 국수 한 그릇, 분식집에서 찐빵 몇 개를 집어 먹고 돌아섰다.

봄의 주인공은 역시 꽃이다. 이달 말이면 포항에도 벚꽃이 피어난다. 지곡동 영일대 호텔도 꽃놀이 명소로 시민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명품 호수와 영일대&청송대 길(일명 ‘리더의 길’)을 갖춰 볼거리와 휴식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일반 호텔 분위기가 아니다. 정원에는 연못과 산책로까지 있다. 영일대는 원래 포항제철소를 짓기 위해 외국인 기술자를 모셨던 영빈관이었다. 이후 호텔로 변신했다.

포항운하도 좋다. 봄 내음은 운하를 타고 동빈내강, 형산강으로 올라온다. 40년간 끊긴 강이 봄을 싣고 다시 흐르고 있다. 썩은 물 위에 콘크리트, 그 위에 있던 집 2000여 채를 옮기고 포항 앞바다를 형산강 하류와 이었다. 길이 1.3㎞, 폭 15~26m의 포항운하가 개통된 것은 2016년. 40년간 갇혀 있던 죽은 물이 살아났다.

풍경도 좋아졌다. 유람선을 타면 송도와 죽도시장 등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볼 수 있다. 운하관 위에 오르면 길게 뻗은 물길과 주변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밤낮없이 수증기를 하늘로 뿜어 올리며 값진 철을 생산하는 포스코의 위용당당한 야경도 좋다.

밤이고 낮이고 엉덩이만 붙이면 배를 두드리고 먹는 일만 남았다. 한 수 아래 가장 크다는 어시장 죽도시장이 있잖은가. 싱싱한 횟감이 널렸다. 여기다 북부시장 등푸른생선 무침회에 뜨끈한 전복죽, 튼실한 문어와 가자미, 마지막 겨울 과메기까지. 떠날 때까지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눈과 코를 채운 포항의 봄은 배도 가득 채운다. 유난히 짧은 대한민국의 봄은 곧 여름에 바통을 내주고 떠날 테지만 유난히 진한 포항의 새봄 내음은 아무래도 윤중로 벚꽃 필 때 정도는 돼야 희미해질 듯하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6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포항에는 포스텍에서 운영하는 로봇박물관이 있다. ‘강남스타일’ 춤을 추는 안드로이드형 로봇, 물개를 닮은 애완용 로봇 등 가족 단위 여행객이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포항크루즈(www.pohangcruise.com)는 8㎞(약 40분)와 6㎞ 코스(약 30분)가 있다. (054)253-04001. 관광 문의 포항시청 관광포털(phtour.ipohang.org).

맛집 전화번호 무침회 명천회식당(054)253-8585. 소고기국밥 궁물촌(054)273-9777. 유화초전복죽(054)247-8243. 해물모듬 해물시티(054)282-2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