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에 있는 조선어학회 표석. 사진 김문관 기자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에 있는 조선어학회 표석. 사진 김문관 기자

최근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돌파(최종 관객 수 285만 명)했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실존했던 조선어학회를 다룬 ‘말모이(감독 엄유나)’다. 말모이는 1910년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편찬하려다 결실을 보지 못한 조선어 사전의 이름이다. 영화는 주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인고의 노력을 한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담았다.

상업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역(현 서울역)에서 1945년 조선어 사전 원고가 우연히 발견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담은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는 필자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고증이 잘못된 부분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주 배경으로 쓰인 조선어학회 건물은 영화처럼 한옥이 아니라 양옥이었다. 또 영화에서는 1층이 서점으로 묘사됐지만, 사실 1층은 고루 이극로 선생(배우 윤계상이 연기한 주인공 류정환)의 거처였고, 2층은 사무실이었다. 또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로 하나하나가 쟁쟁한 인물들이었지만 너무 코믹하게만 묘사된 점도 아쉬웠다.

조선어학회 활동이 대단한 점은 영화에서 보여줬듯이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를 내세우며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해 조선어과목을 폐지하고 학교 안에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했다. 따라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눈엣가시였다. 종로경찰서 형사들은 매일같이 조선어학회 회관을 출입하며 감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참여했던 활동을 보면,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사건, 상록회 사건 등에 이른다. 조선어학회는 학회 역할도 수행했으나, 국내에서 조직된 민족운동 단체나 다름없었다.

특히 조선어학회를 이끈 이극로는 어마어마한 인물이었다. 중국 상하이 동제대에서 공부한 그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당시 조선일보는 ‘조선 최초의 경제학 박사’로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 베를린대에서 경제학과 함께 어학을 공부했고, 베를린대에 조선어강좌를 개설해 1922년부터 3년간 조선어를 가르쳤다.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 박사가 외국 대학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독특함을 보여준다. 이후 그는 독일 박사 출신으로 조선어학회를 이끌었기 때문에 학계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귀국 사실이 신문에 소개됐고 그의 결혼식 역시 신문 지상에 나올 정도로 그는 ‘스타’였다. 실제로 1929년 2월 16일 자 조선일보에는 ‘조선 최초의 경제학 박사, 재작년 2월에 백림(伯林)대학 졸업 후 금의환향한 이극로씨’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백림대학은 베를린대의 당시 표현이다.

이극로는 조선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돈을 벌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한글운동에 매진했다. 1930년대 말 조선어학회의 재정난이 타개되지 않은 상황이라, 다른 회원들은 취직하고 여가에 사전 편찬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극로만은 사전 편찬실을 지켜나갔다.


우리나라 최초 부동산 개발자가 기증

이극로 선생. 사진 조선일보 DB
이극로 선생. 사진 조선일보 DB

그러나 스타급 학자가 이끈 조선어학회 활동은 지극히 험난했다. 이극로는 학회 운영비가 떨어지면 이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129, 어떻게 산단 말인가?”라며 한숨 내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29는 조선어학회 회관이 소재한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를 뜻한다. 현 도로명 주소로는 율곡로3길 74-23 근처다. 조선어학회를 129로 부를 만큼 이극로에게 화동 129번지 조선어학회 회관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영화에서도 조선어학회 회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촬영이 이뤄졌다. 그만큼 화동 129번지는 반드시 기억돼야 할 장소이다. 그런데 조선어학회 회관이 어디에 위치하며, 현재 제대로 원형은 보존돼 있는지 그리고 회관은 누구에 의해 건립됐는지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나.

조선어학회 회관은 북촌 일대를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디벨로퍼(부동산 개발자)이자 민족운동가인 기농 정세권 선생이 기증한 곳이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회관이 화동 129번지에 생긴 것에 감격해 정세권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극로는 “이 학술단체(조선어학회)가 어떻게 (성장)돼 왔나를 간단히 적으려 한다. (중략) 6년 전에 비로소 서울 수표정(현 수표동) 42번지 조선교육협회 집안에서 방 한 칸을 얻어서 곁방살이로 문패를 붙이게 됐다. 그 뒤로 우리는 사전편찬, 잡지간행, 철자법 통일안 작성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건양사 사장 정세권씨로부터 서울 화동 129번지 2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 회관으로 감사히 제공받게 됐다. 그래서 올해 이 집으로 회관을 옮기게 됐다.

조선어학회가 문패를 붙이고 독립한 호주가 된 것은 창립 이후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이 학술단체가 독립된 호주가 되도록 성장한 것은 오직 조선어학회 회원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과학적 사업에 대한 조선 사회의 많은 동정이 있었던 까닭이다. 끝으로 우리 조선어학회는 특별히 정세권씨에 대해 감사함을 마지아니하는 동시에 적은 힘이나마 더욱 정성을 다해 여러분의 바라는 바를 이루도록 힘쓰려 한다”고 했다.

영화 ‘말모이’에서 나왔듯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많은 이들이 고초를 당했다. 학회원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했다. 학회 대표인 이극로의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회관을 기증하고 재정을 후원한 정세권 역시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극로 선생이 고문당한 후 (우리 집) 혜화동으로 오셨어요. 오셨는데 그냥 바지 뒤가 전부 피투성이였어요. 고문당한 이야기를 아버지(정세권)랑 한참 하시고 가셨어요.” 정세권의 유족이 기억한 이극로 선생의 고문 후 이야기다.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한 투옥 후 상당한 재산을 일제에 빼앗긴 후 사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조선어학회 대표 이극로는 반드시 재조명돼야 할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 회관을 기증했던 정세권 역시 재조명돼야 한다. 이극로, 정세권과 함께 모든 민족운동을 함께한 다른 인물, 당시 민족 언론계의 표상인 민세 안재홍(조선일보 6대 사주) 역시 함께 재조명돼야 한다. 이들 3인은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학회 활동을 함께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두 투옥당하고 고문당했다. 그렇기에 화동 129번지는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하다.

곧 3·1절이다. 정세권이 개발한 북촌과 익선동 등지는 분명 많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다. 한옥의 멋진 외양에만 감탄하지 말고, 한옥집단지구를 개발한 대자본가 정세권이 자신이 번 돈을 어떻게 민족운동에 바쳤는지, 그의 동지인 이극로와 안재홍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이들 모두가 조선어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화동 129번지가 왜 소중한지를 잠시나마 반추했으면 한다.


▒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원장, 공유도시랩 디렉터, 금융위원회 금융발전심의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