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서울284 2층에 마련된 코너 ‘근대의 맛’에선 서울 곳곳 인기 있는 카페 8곳이 돌아가며 ‘근대’를 주제로 새롭게 만든 커피를 무료로 제공한다. 사진 문화역서울284
문화역서울284 2층에 마련된 코너 ‘근대의 맛’에선 서울 곳곳 인기 있는 카페 8곳이 돌아가며 ‘근대’를 주제로 새롭게 만든 커피를 무료로 제공한다. 사진 문화역서울284

요즘 동네에 치킨집보다 커피숍이 더 많다. 웬만한 편의점은 커피 머신을 갖추고 있으니 이 도시에는 물보다 커피가 더 흔한 셈이다. 언제부터 커피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됐을까.

문화역서울284에서 지난해 12월부터 커피의 역사를 담은 ‘커피 사회’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세계커피기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이 377잔으로 세계 6위다. 그만큼 이 전시회는 세계적인 커피공화국의 위상에 걸맞은 기획이다. 전시회가 열리는 옛 서울역은 본격적인 커피 문화가 시작된 장소이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등장한 바 있는 경성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 ‘그릴’과 1·2등 대합실의 티룸은 당시 경성을 주름잡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오가던 문화의 장이었다.

문화역서울284의 ‘커피 사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의 문화와 예술에 얽힌 이야기를 커피로 풀어낸다. 전시장에 들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 음악이다. 뮤지션 성기완은 수많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났던 1층 중앙홀에 음악다방을 차렸다. 에르메스 매장의 윈도 작업으로 유명한 길종상가의 박길종은 그 중앙에 옛날 캔커피와 프리마 병, 인스턴트 커피 포장지, 커피잔 등으로 이뤄진 초록색 융단의 거대한 커피나무를 세웠다. 이를 시작으로 1층과 2층의 전시장에서는 지난 100여 년간의 커피 문화 변천사를 조명하는 아카이브 자료와 예술가들의 작품이 이어진다.

귀빈실에는 조선 최초의 커피 마니아 고종 황제의 흔적이 사진으로 기록돼 있다. ‘제비다방과 예술가들의 질주’라고 명명된 1·2등 대합실에서는 시인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을 통해 새로운 문화와 예술이 꽃피던 문예다방의 기원을 살핀다. 이곳에서는 1930년대의 시와 수필·소설 등의 문학 자료를 감상하고, 이상학회 포럼에 참여할 수도 있다. 부인 대합실은 1950~60년대 명동시대를 재현한다. 1956년 여성지 ‘여원’에는 “길에서 동무들을 만나 한잔 따끈한 차를 마시는 즐거움. 동창들의 결혼한 이야기, 누구누구의 연애 이야기, 이렇게 이야기에 꽃을 피우면 동지를 갓 지난 겨울 해는 어느새 서산을 넘는다”라는 내용이 실렸다. 당시 명동에 상당수의 다방이 들어섰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충무로와 중앙로, 명동 입구에서 명동성당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이 시기 다방은 예술가들의 작업실이자 사무실이었으며, 다양한 문화행사가 개최되는 문화 살롱이기도 했다. 음악을 매개로 동시대의 서브 컬처 문화를 만들어 온 ‘360사운즈’의 박민준과 윤석철은 현대의 관점에서 ‘돌체 다방’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역 앞에 문을 열었다가 해방 이후 명동으로 이전했던 돌체 다방은 1980년대 문을 닫을 때까지 명동을 대표하는 음악 다방으로 유명했다. 커피를 혀 대신 시각과 촉각,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이 방에서는 전시 기간에 10회 이상의 퍼포먼스도 진행된다.

3등 대합실에서는 ‘윈터 클럽’이 개최 중이다. 주로 계보적 문화 탐구로 구성된 다른 섹션들과 달리 윈터 클럽은 커피를 구실 삼아 작동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상기시킨다. 겨울, 실내 스포츠, 클럽 액티비티 등을 소재로 만들어지는 대합실의 풍경은 마치 놀이터 같다. 기묘한 탁구대가 설치된 대합실에서 시소를 타고 노는 관람객들의 놀이 풍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2등 대합실에 위치한 ‘제비다방과 예술가들의 질주’ 코너. 시인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을 재현한 곳. 사진 문화역서울284
2등 대합실에 위치한 ‘제비다방과 예술가들의 질주’ 코너. 시인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을 재현한 곳. 사진 문화역서울284
1층 중앙홀에 위치한 커피 나무. 옛날 캔커피와 프리마 병, 인스턴트 커피 포장지, 커피잔 등으로 이뤄져 있다. 사진 문화역서울284
1층 중앙홀에 위치한 커피 나무. 옛날 캔커피와 프리마 병, 인스턴트 커피 포장지, 커피잔 등으로 이뤄져 있다. 사진 문화역서울284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커피 역사 담아

2층 그릴에서는 요즘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커피전문점들의 커피를 무료로 맛볼 수 있다. ‘펠트 커피’ ‘대충유원지’ ‘보난자 커피’ 등 참여 업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문화역서울284스페셜 블렌딩과 근대 메뉴를 선보인다. 예컨대 보난자 커피는 디저트처럼 즐길 수 있는 커스터드 커피를 제안한다. 뜨거운 커피에 날달걀 노른자를 풀고 참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려 먹던 1970년대 한국식 모닝커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대충유원지는 옛날 다방에서 즐겨 먹던 쌍화차의 풍미를 커피로 구현한 쌍화양탕을 선보인다. 붉은 카펫이 깔린 앤티크한 커피 바의 높다란 의자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이색 커피를 맛보면 진짜 과거로 시간 여행이라도 떠나온 듯한 기분이 된다.

커피는 시대에 따라 제조법과 맛은 물론 그 의미도 달라졌다. 구한말의 커피는 몰락해가던 황실의 마지막 호사였고, 근대 커피는 경성의 지식인들을 매혹했으며, 해방 이후의 커피는 달콤하고도 쓴 자유의 맛이었다. 1970~80년대 산업화 시대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 여성들의 성을 상품화하는 퇴폐 다방이 성행하기도 했다. 1968년 동서식품이 인스턴트 커피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식어갔던 원두커피와 다방의 열기가 다시 불타오른 건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커피 수입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면서부터다. 1988년 겨울 서울 압구정파출소 앞에 문을 연 원두커피전문점 ‘자뎅’은 압구정동 오렌지족의 커피숍 문화를 이끌었다. 외환 위기 때는 값싼 생두를 구입해 로스팅해 파는 로스터리 카페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99년 7월, 이화여대 정문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이 들어섰다. 오는 5월에는 미국산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을 대표하는 ‘블루 보틀’이 성수동에 1호점을 열 예정이다. 거리의 커피숍이 가로수 숫자만큼 늘어나면서 어느새 커피 자판기는 공중전화처럼 잊힌 과거의 유물이 됐다. 바야흐로 커피 춘추전국시대다.

에티오피아의 하레르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기도문이 있다. ‘커피 주전자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커피 주전자는 아이들을 자라게 하며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하나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테이블 위의 맛있는 커피를 향한 신성한 경배가 아니겠는가. 치킨집보다 많은 커피숍이 오늘날의 자영업자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티타임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평화롭다. 추운 겨울, 따뜻한 커피 한 잔의 낭만과 여유가 있는 옛 서울역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단지 기호 식품이 아닌 문화로서의 커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