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의 사랑을 한다. 누군가에게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같은 사랑을 하는 이에게 슬픔이 된다. 깊이 사랑할수록 불안에 침몰하는 건 그 까닭일까.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질 때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빠졌음을 안다.

격렬히 싸우고 화해한 직후, 화해는 가장에 불과하고 절망은 숨결처럼 가까이 있음을 알 때가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끝이 언젠가는 증오가 아니라 회한임을 깨달을 때 이별이 온다. 이별은 온순해질 때 비로소 이별이 찾아온다는 걸 나는 이제 잘 알고 있다.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벌어진 우리의 갈등은 관계를 너무 깊고 멀리 벌려 놓았다. 상처의 말들이 깊은 자국을 남겼고 둘 다 쉽게 털고 일어서지 못했다. 우리는 관계를 회복시키는 대신 이별을 천천히 맞이하기로 했다. 애도의 기간처럼 이별의 기간을 서성이듯 보냈다. 자주 만났고 지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만나지 못할 때는 전화기를 붙잡고 긴 시간을 보냈다. 사랑의 말들이 아니라 원망과 슬픔, 미련의 말들이었고 그중 절반을 우리는 울었다. 만날 때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기분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만났다. 누군가 우리의 사이를 묻는다면, 헤어지는 사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지만, 우리는 연인과 연인 아님의 사이를 흔들흔들 떠다니며 겨울의 한복판을 지났다.

눈이 가득 내리고 난 다음 날 아침, 식욕이 없다는 말을 듣고 그가 말했다.

“내가 가서 해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당신은 쉬고 있어. 내가 우렁각시처럼 다 해 줄게.”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다

그를 기다리며 나는 간단히 샤워했고 머리를 말리자마자 그가 도착했다. 문을 열자 크고 곧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이 현관을 꽉 채웠다. 부엌으로 들어가 칼을 들고 도마 위를 달리던 그의 손에 상처가 났다. 새로 산 칼은 너무 예리했다. 그의 손가락을 잡고, 예전처럼 내 입에 넣고 싶었지만, 그래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서랍을 뒤져 반창고를 꺼내 건네주는 수밖에. 부엌을 제 공간처럼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나를 깨닫고 당황하고 말았다. 식탁에 마주 앉아 그가 해 준 밥을 천천히 먹고 그가 타 준 커피를 마셨다. 마치 예전처럼 그렇게. 아무 일 없었던 듯, 그 옛날의 다정함으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벼운 피로가 몰려왔다. 그에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 같이 있어 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몸을 함께 누이자, 다시 예전처럼 그의 팔에 안겼고 잠시 후 다시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눴다. 알몸으로 끌어안은 채 오후의 햇살이 빛을 잃어갈 무렵까지 우리는 이불 속에 함께 있었다. 그는 밝고 경쾌했고, 수다스러웠다. 언제부터인가 쉽게 볼 수 없었던, 가볍고 유쾌했던 모습이었다. 뒤늦게 직장에 나가야만 했지만, 그는 일어서다 말고 다시 나를 끌어안고 말을 이어가길 반복했다. 말하고 또 말했다. 옷을 입고 방을 나선 뒤에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해야 하는 걸까 궁리하면서도 지금쯤은 혼자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나눈 뒤 우리는 동의했다.

“우리는 말이야,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좀 있어 보자.”

그가 떠나면서 예전처럼 나를 다시 안았다. 입을 맞췄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벅차도록 행복했던 그 시절처럼. 그가 나가면서 말했다.

“추우니까 그냥 있어요.”

그를 그렇게 보낸 뒤 깨달았다. 그는 한참을 걸어 나가야 하고 우리 집에서 차를 탈 만한 곳까지 가려면 아득한 비탈길을 내려가야만 한다. 너무 늦지 않길 바라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려.”
“응.”

그가 순순히 허락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예전의 그라면 괜찮다고 했을 텐데.

나는 차 키를 들고 나가 그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줬다.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는 자꾸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울고 싶어졌다. 오래전의 헤어짐이 떠올랐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해였다. 그때는 내가 남자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남자가 나를 지하철역까지 배웅했고 내가 계단을 내려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남자는 이십 대의 마지막을 보내던 때였고 나는 유학 생활을 정리하던 차였다. 그때가 마지막이 될지 몰랐지만 돌이켜 보니 마지막임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알았다.

그래, 이별이 온순해질 때 비로소 이별이 찾아온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내게 온순함 말고도 감기를 주고 간 것 같지만.


사랑을 주고 상처 입히기를 거듭했다

그를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말했다. “우리의 관계를 지금까지 결정해 온 건 당신이었어.”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며 지내왔어. 당신이 그렇게 느끼는지 몰랐어.”

그는 나의 종잡을 수 없음, 변덕,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제멋대로 반복하는 과정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랬다. 그의 평범한 연인과는 조금 다른 존재 방식이 낯설고 불안했다. 그래서 자꾸 헤어지자고 말하고야 말았다. 나를 붙잡지 않을까 봐 무서웠지만 자꾸 내뱉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나를 더 이상 예전처럼 붙잡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가 말했다. 나로 인해 지금껏 사람을 만나고 사랑했던 방식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다른 남자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한다고. 나는 대답했다. “당신이 예측이 힘든 연인인 건 맞아. 하지만 내가 사랑한 건 일반적 의미로서의 연인이 아니라 당신이란 사람이야. 당신에게 남들의 방식을 강요한 건 내 잘못이 맞아. 이제야 당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작동하는 사람인지 헤아릴 수 있어.”

우리는 서로에게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고 상처를 입히기를 거듭했다. 달콤함과 불안함은 언제나 함께 왔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의심한 적은 없으나 자기 존재의 불안함을 서로에게 투영하며 상대를 괴롭혀 온 것은 맞다. 넋을 놓을 만큼 강렬했던 열정이 지나간 뒤 갈 길을 알지 못해 함께 헤맸다. 여전히 알 수가 없지만 지금은 그저 알 수 없음에 머무르기로 한다. 너무 힘이 빠졌다. 일단은 백기를 들듯 항복. 생각도 멈추고 기대도 접고 그냥 그렇게. 온순한 이별이 비로소 왔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