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펑크 룩과 헨델의 바로크 음악이 만난 쇼, ‘세멜레 워크’. 사진 통영국제음악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펑크 룩과 헨델의 바로크 음악이 만난 쇼, ‘세멜레 워크’. 사진 통영국제음악제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가 대형 신작을 선보인다. 패션 브랜드 ‘구호’의 신상품 얘기가 아니다. 바로 공연이다. 2016년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묵향’으로 공연 연출가로 변신한 정구호는 궁중정재, 종교제례, 민속무용 등 한국을 대표하는 춤을 새롭게 엮은 ‘향연’까지 연이어 성공시킨 바 있다. 그는 6월 29~3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색동’을 통해 강렬한 색채와 미장센으로 우리 춤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정구호는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황진이’ 등의 의상을 담당하며 전통문화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의상은 물론 무대 디자인, 음악, 연출까지 작품 전반을 지휘하는 정구호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은 최근 인천 영종도에 문을 연 복합 리조트 ‘파라다이스시티’ 내 아트스페이스 개관전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제프 쿤스의 거대한 석고상과 데미안 허스트의 화려한 페인팅 작품, 숯과 먹을 이용해 한국적 미니멀리즘을 선보이는 이배, 김호득 작가의 설치 작품까지 함께 전시한 ‘無節制 & 節制(무절제 & 절제)’의 기획을 맡았다. 또 이 전시회의 갈라 디너 공연까지 책임졌다. 전 세계 문화·예술인과 유명 인사 270여 명이 초대된 가운데 ‘향연’ ‘묵향’의 일부를 선보였고, 씽씽밴드 이희문의 펑키한 경기 민요 공연이 이어졌다.

비단 정구호뿐만 아니다. 패션쇼에 익숙한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공연은 또 하나의 무대다. 패션과 공연 예술의 협업은 연출자와 디자이너 모두에게 새로운 실험을 가능케 한다. 패션 하우스에 사는 디자이너들에게 공연장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넓은 마당이다. 집 안에서 할 수 없는 어떤 파격적인 놀이도 이 마당에서는 가능하다. 연출자는 정형화된 무대나 의상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퍼포먼스를 보여줄 기회를 얻는다. 디자이너의 유명세로 인한 홍보 효과는 덤이다. 협업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오페라와 발레, 실험극 등의 공연을 위한 의상 디자인 참여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펑크 룩과 헨델의 바로크 음악이 만난다면? 2011년 독일 하노버에서 초연된 뒤, 호주 시드니 페스티벌을 거쳐 통영국제음악제 개막무대에 오르기도 했던 ‘세멜레 워크’는 오페라로 통합된 80분간의 패션쇼였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면 소프라노와 카운트테너들은 새하얀 런웨이에서 워킹하며 노래하고, 백스테이지에서는 드레스와 하이힐이 날아다닌다. 관객들은 패션쇼에서처럼 런웨이 양옆에 마련된 객석에 앉아 이 화려하고 몽환적인 쇼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헨델의 고전 오페라 ‘세멜레’의 패션쇼 버전이다.

‘세멜레 워크’의 연출자 루드거 엔젤스는 이상기온과 환경 문제를 주제로 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2011년 ‘골드 라벨 컬렉션(Gold Label Collection)’을 보고, 그녀에게 공연 의상 크리에이터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욕심과 허영은 오늘날 지구 온난화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의 궁중 의상 같은 황금빛 오트쿠튀르(맞춤 고급 의류를 만드는 의상점) 드레스와 함께 실제 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얼룩지고 과장된 메이크업으로 작품의 주제 의식을 드러냈다. 욕망으로 가득한 패션쇼 현장이 그대로 오페라 무대가 된 셈이다.

때로 디자이너들은 존경과 경외의 의미로 공연 의상 제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안나 파블로바가 발레를 하는 옛 사진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왔다”는 칼 라거펠트는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 돼준 전설적인 발레단 ‘발레 뤼스’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빈자의 백조’ 공연을 위해 2500개가 넘는 깃털로 된 튤 드레스(푹신푹신한 프릴을 많이 붙인 드레스)를 완성한 바 있다. 3명의 장인이 총 300여 시간에 걸쳐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인 명품 발레복이다. 국내 창작 뮤지컬 ‘선덕여왕’과 배우 안석환의 연출 데뷔작 ‘대머리 여가수’ 등의 공연 의상 제작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이상봉은 원래 꿈이 연극배우였다.


사군자를 소재로 정갈한 선비의 정신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전통춤으로 담아 재해석한 ‘묵향’. 사진 국립극장
사군자를 소재로 정갈한 선비의 정신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전통춤으로 담아 재해석한 ‘묵향’. 사진 국립극장
궁중정재, 종교제례, 민속무용 등 한국을 대표하는 춤을 새롭게 엮은 ‘향연’. 사진 국립극장
궁중정재, 종교제례, 민속무용 등 한국을 대표하는 춤을 새롭게 엮은 ‘향연’. 사진 국립극장

협업 성공의 조건은 서로에 대한 신뢰

하지만 이들의 순수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패션과 공연 예술의 협업이 언제나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떠난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이 의상을 담당하고 아방가르드 연극의 대가 로베르 르빠주가 연출한 초특급 프로젝트 ‘에온나가타(Eonnagata)’는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의상을 선보였음에도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혹평을 받아야만 했다. 스텔라 매카트니는 아버지 폴 매카트니가 모든 곡을 작곡한 뉴욕시립발레단의 ‘오션스 킹덤’ 의상을 디자인하면서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처음 이야기가 오갈 당시엔 40벌이나 되는 의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몰랐거든요.”

몸의 움직임과 의상의 무게를 일일이 신경 쓰며 본인의 스타일뿐 아니라 작품의 스토리와 음악까지 고려해 옷을 디자인한다는 건 경험 많은 디자이너들에게도 꽤 까다로운 일이다. 화제와 흥행, 단순한 경험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려면 오랜 논의 과정과 창작자로서 서로에 대한 신뢰, 작품과 디자이너 스타일 간 합일점이 있어야 한다.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파리를 거쳐 2014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도 열렸던 ‘문화 샤넬’ 전시의 주제는 1924년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발레 ‘푸른 기차’였다. ‘발레 뤼스’를 창단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연출에 파블로 피카소가 무대 장막과 프로그램 표지를 그리고,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다리우스 밀로가 작곡을, 큐비즘(3차원적 시각을 통해 표면에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미술 운동) 조각가 앙리 로랑스가 세트를 제작했다. 가브리엘 샤넬은 자유로운 새 시대의 도래를 보여주는 작품의 콘셉트에 맞춰 수영복이나 체조복처럼 움직임이 편한 여러 벌의 저지(지퍼가 달린 자켓) 의상을 준비했다. 참여 작가들의 이름만으로도 황홀한 이 공연은 시대 정신을 살린 모던하고 담대한 작품으로 당시의 관객뿐 아니라 평론가에게도 호평받았다.

영화와 방송, 팝 콘서트에 밀려 한동안 패션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공연 예술이 다시 한번 왕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직 21세기 최고의 컬래버레이션은 탄생하지 않았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