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표현주의 연출가인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사진 옥상훈, 월드아트오페라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표현주의 연출가인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사진 옥상훈, 월드아트오페라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는 나라 잃은 왕자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던 한 남자의 인생까지 역전시켰다. 초라한 외모의 폴 포츠가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르던 순간, 그는 가난한 휴대전화 판매원이 아니라 칼라프의 왕자였다. 2007년 영국 TV 프로그램 ‘브리튼즈 갓 탤런트’를 통해 국제적인 인기를 얻은 폴 포츠는 요즘 한국 방송에도 종종 출연한다. MBC ‘복면가왕’에 포청천으로 등장한 데 이어 최근에는 유튜브 뮤직 크리에이터 넵킨스와 합동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 남자의 인생 드라마가 되고 CF 로고송으로도 등장하는 오페라 아리아는 이제 꽤 익숙한 음악 장르가 됐다. 오페라는 더 이상 소수의 고급문화가 아니다.

지난 11월, 바그너의 오페라 4부작 ‘니벨룽의 반지’ 중 제1부 ‘라인의 황금’이 막을 올렸다. 올 초부터 기다려온 공연이었다. 바그너가 28년 만에 완성했다는 ‘니벨룽의 반지’는 연주 시간만 17시간에 달하는 대작이다. 신들이 라인강의 난쟁이로부터 훔쳐낸 황금의 저주와 그 저주로 인해 파멸로 향하는 세계를 구하려는 영웅 지크프리트의 모험을 다룬 이 음악극은 영화 ‘반지의 제왕’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제작한 건 국내 오페라 70년 역사상 처음이다.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내년에는 ‘발퀴레’와 ‘지크프리트’, 2020년에는 ‘신들의 황혼’이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제작비도 엄청나다. 편당 약 30억원씩, 총 120억원이다.

가장 중요한 연출가는?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마지막 직계 제자이자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표현주의 연출가인 아힘 프라이어가 직접 연출을 맡았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기다림의 이유는 충분했다. 오페라 연출가이자 화가, 무대미술가, 영화감독이기도 한 프라이어는 작곡가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연출을 맡은 바 있다. 이 역시 대단한 공연이었는데, 2007년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켄트 나가노의 지휘로 초연된 진은숙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독일 오페라 역사를 다시 썼다. 예매 시작 하루 만에 모든 좌석이 매진됐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뜨거운 찬사가 이어졌다. 독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200년 역사상 여성 작곡가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 건 처음이었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진은숙은 진중권의 누나로 더 유명하지만 당시 공연 실황을 찾아본 나는 음악만큼이나 실험적이고 환상적인 무대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때부터 프라이어의 다른 공연을 찾아봤다.

이번 ‘니벨룽의 반지’는 프라이어의 부인인 에스더 리가 설립한 월드아트오페라가 제작을 맡았다. 기대작인 만큼 ‘라인의 황금’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특히 랠프 바이커트의 지휘와 바그너 연주에 익숙하지 않은 오케스트라 연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다수다. 물론 클래식 음악 전문가들 입장에선 부족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눈이 즐거운 공연이었다. 오페라계의 피카소답게 프라이어는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배경 그림과 의상을 직접 디자인했다. 원색적인 색감과 종이인형처럼 옷의 아웃라인을 과장한 의상들은 패션디자이너 카스텔 바작의 그것처럼 유머러스했다. 캐릭터의 성격을 강조한 커다란 인형탈은 이탈리아 전통 광대극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신들의 신’인 보탄이 사는 성채이자 난쟁이들의 세계인 니벨하임의 광산으로 쓰인 철골 구조물 외에는 특별한 무대세트가 없었지만, 양옆에 설치된 거울과 화려한 조명 효과만으로도 무대는 꽉 채워졌다. 한 편의 기묘한 동화를 눈으로 보는 느낌이랄까. 지난 3월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스마트폰, 환경 파괴, 핵폭탄 등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반영하겠다”고 말한 프라이어는 시각적 판타지를 이용해 ‘인간의 탐욕’이라는 고전 메시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확실히 지금까지 보아온 여느 오페라와는 달랐다.


1987년 1월 서덜랜드(왼쪽)와 파바로티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람메르무어 루치아’를 공연하는 모습.
1987년 1월 서덜랜드(왼쪽)와 파바로티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람메르무어 루치아’를 공연하는 모습.

강좌 통해 다가가는 오페라

만약 아직 오페라가 낯설다면 한 번쯤 오페라 강좌를 들어보길 권한다. 내가 오페라에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우연한 기회에 접한 강연 덕분이었다. 클래식 음악 공간 ‘풍월당’의 박종호 대표가 진행하는 오페라 클래스였는데,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합창 대회처럼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오페라가 TV 연속극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그날 다룬 내용은 ‘리골레토’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라 트라비아타’의 아리아였다.

박종호의 유머러스한 해설과 함께 1987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 영상에서 조안 서덜랜드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등장하자 사람들 사이에선 웃음이 터졌다. 주름진 얼굴로 사랑에 빠진 10대 소녀를 연기하는 서덜랜드는 아무래도 우스꽝스러웠고, 150kg이 넘는 거구의 파바로티는 칼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조차 주위 사람들의 부축이 필요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들의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최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경쾌한 움직임과 화려한 음색, 정확한 최고 음역을 가진 소프라노)로 칭송받는 서덜랜드의 아리아만큼은 젊은 여자의 아름다움이었고, 파바로티의 카발레타(오페라 중 짧고 간결한 노래)는 유혹적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의 파바로티는 에너지가 넘쳤다. 아리아 선율과 함께 달콤한 사랑에 들뜨거나 슬픔에 잠기고 때론 절망하는 동안 이들의 목소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감수성을 지닌 하나의 악기였다.

마지막 악장까지 들어야만 그 음악적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클래식과 달리 오페라 아리아는 인간의 순간적인 감정을 몇 분의 짧은 시간 안에 담아낸다. 때문에 사람들은 극 전체 내용을 몰라도 아리아를 이해할 수 있다. 바그너를 비롯해 베르디, 모차르트, 푸치니처럼 위대한 작곡가들이 곡을 만들고 시인의 서정적인 가사에 천상의 목소리가 어울렸으니 당연하지 않을까. 거기에 멋진 무대 연출까지 곁들여진 오페라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종합예술이다. 예술의전당에서 첫 공연을 끝낸 ‘니벨룽의 반지’는 내년 3월 성남아트센터에서 두 번째 작품을 선보인다. ‘발퀴레’는 160분이었던 ‘라인의 황금’보다 공연 시간도 훨씬 더 길고 그만큼 제작비도 더 든다. 부디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길! 한 해 최고의 공연이 줄을 잇는 연말, 괜찮은 오페라 한 편 관람해보는 것은 어떨까.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