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이블린주 푸아시에 위치한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작 ‘빌라 사보아’.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 이블린주 푸아시에 위치한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작 ‘빌라 사보아’.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 파리에서 23㎞ 떨어진 이블린주(州) 푸아시(Possiy)는 건축인들의 순례지다. 현대 건축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빌라 사보아(Villa Savoye)’가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빌라 사보아는 필로티 구조(벽면 없이 기둥만으로 하중을 견디는 개방형 구조)와 수평창(가로로 긴 창), 자유로운 파사드(건물의 출입구로 이용되는 정면 외벽) 등을 처음 선보인 건축물로, 오늘날까지 주택 설계 그 이상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곳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장 마크 사보아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빌라 사보아 설계를 의뢰한 건축주의 손자로, 프랑스 출판사 갈리마르드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편집자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피에르 사보아)와 할머니(유제니 사보아)가 이 집을 통해 꿈꾼 것들을 가족사로 풀어냈다. 르 코르뷔지에의 현대식 주택에 매료된 유제니 사보아가 1918년 여름, 이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주택 건축을 의뢰하고자 보낸 한 통의 편지로 그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파리에서 꽤 성공한 기업가로 인정받던 피에르 사보아와 그의 아내 유제니 사보아는 시골 별장을 지어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건축 의뢰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은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만큼 형식적이고, 건축주의 요구 사항은 무척 분명해 보인다.

“르 코르뷔지에 선생님. 제가 시골 별장에 바라는 주요 세부 사항을 보내드립니다. 온수와 냉수, 가스, 전기(조명과 플러그) 그리고 중앙난방을 원합니다. (중략) 거실은 간접 조명에 식탁 위에는 횃불 등롱(燈籠), 플러그 5개와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으면 합니다. 이 공간은 완전한 직사각형은 아니되 편안한 구석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중략) 추가 공사 진행 또는 공사 규모 축소 시 공사 대금은 기본 계약 내용에 따라 책정합니다. -유제니 사보아”

이들은 큰 집을 바라지 않았다. 빌라 사보아는 사보아 부부와 외아들 로저, 단 세 사람을 위한 공간이었다. 여기에 가정부와 요리사, 운전기사와 정원사를 위한 숙소 정도가 추가됐을 뿐이다.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지어 달라’는 식의 편지 내용 자체는 단조롭지만, 이를 토대로 이 집에 거주할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들은 핵가족이고, 자동차로 이동하며, 당일치기로 파리를 오가고, 여자도 운전할 정도로 독립적이며, 모던함을 추구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운전 실력이 형편없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근대 건축 5원칙 중 하나이기도 한 빌라 사보아의 그 유명한 필로티 구조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운전에 미숙한 유제니 사보아의 편리한 주차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빌라 사보아 모습을 그린 장 필립 델롬의 작품. 사진 이미혜
빌라 사보아 모습을 그린 장 필립 델롬의 작품. 사진 이미혜

편리한 주차 위해 만든 필로티 구조

필로티 구조란 벽면 없이 기둥을 세워 건물의 하중을 견디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 빌라촌에 가면 개방된 1층 공간엔 주차장이 마련돼 있고 2층부터 방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필로티 구조다. 르 코르뷔지에 이전엔 기둥을 사용하지 않고 벽을 사용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벽은 지붕을 받치고 있지 않아 하중을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가로로 긴 유리창인 수평창을 내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이전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하중 때문에 세로로 긴 창을 사용했다.

1924년 자동차 운전면허를 딴 후 푸조 203을 몰고 자랑스레 파리와 푸아시를 오갔던 유제니 사보아는 후진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는 빌라 사보아의 구조가 무척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유별난 자동차 사랑을 보인 르 코르뷔지에는 이 점을 각별히 신경 썼다. 1930년대 무렵, 어느 독일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이제부터 집의 최소 규모를 결정하는 새로운 요소는 바로 자동차”라 말하기도 했다.

곧 국내에 출간될 예정인 오부와 출판사의 ‘르 코르뷔지에: 빌라 사보아의 찬란한 시간들’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에 대한 매우 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빌라 사보아의 매력에 흠뻑 빠진 프랑스의 일러스트레이터 장 필립 델롬은 이 책의 저자인 장 마크 사보아의 증언을 바탕으로 마치 오래전 이 집에 거주했던 것처럼 생생하게 사보아 가족의 일상을 그림으로 옮겼다. 장 필립 델롬은 ‘보그’ ‘뉴요커’ 등 매거진을 비롯, 루이뷔통, 몽클레어 등과 협업해온 유명 작가다.

이 책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관광 명소가 된 일류 건축물의 건축사적 가치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공간으로서 빌라 사보아를 재조명한다는 점이다. 건축가의 이름이 인증마크처럼 찍힌 미술관에서 전시를 해 본 작가와 큐레이터들은 농담처럼 “유명 건축가가 지은 건물은 꼭 냉난방에 문제가 있거나 비가 샌다”고 불평한다. 빌라 사보아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건축주는 푸아시에 거주하는 내내 이런저런 애로 사항을 잔뜩 담은 컴플레인 편지를 르 코르뷔지에에게 전달했다.

“무슈(‘귀하’의 프랑스어), 현관 입구에 물이 새고, 경사로에도 물이 새고, 주차장 벽은 완전히 젖었습니다. 게다가 비가 올 때마다 제 욕실에도 항상 물이 샙니다. 천장에 있는 창문으로 물이 들이칩니다.-유제니 사보아”

오부와 출판사는 책 출간을 기념해 특별한 전시회를 기획했다. 서울 효자동의 ‘더 레퍼런스’에서 11월 30일부터 12월 16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서는 장 필립 델롬의 원본 일러스트 30여 점과 사진, 영상 등이 공개된다. 르 코르뷔지에와 근대 건축 5원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부담 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빌라 사보아라 불리는 어느 아름다운 집과 그 공간에서 따뜻한 시간을 보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공간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면 전시장을 방문해 보시길. 개인적인 이유를 떠나 이 예쁜 집과 가족의 사연이 꼭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