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2018 F/W 패션쇼. 사진 이미혜
샤넬의 2018 F/W 패션쇼. 사진 이미혜

“왜 패션위크를 1년에 두 번이나 하죠? 한 번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최근 모 재단에 취임한 디자인계 인사가 서울패션위크 준비를 앞둔 누군가에게 했다는 말이다. 아마 이 같은 발언엔 ‘패션쇼는 돈 낭비, 시간 낭비’라는 패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묻고 싶다. “왜 계절은 1년에 네 번이나 바뀌는 걸까요?” 굳이 봄·여름, 가을·겨울로 시즌을 나눠 두 차례나 패션쇼를 진행할 이유도 없을 텐데 말이다. 이건 신에게 따져 물을 일이다. 패션쇼의 유례와 정확한 시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쇼가 시작된 건 1908~1910년으로 알려졌다.

그 옛날 패션쇼는 드레스 가게 주인들이 부유한 고객들에게 자신의 최신 디자인을 선보이기 위해 고안한 하나의 마케팅 수단이었다. 20세기 초 고급 부티크를 운영하던 디자이너들은 가게 직원이나 마네킹을 모델로 내세워 비공식 살롱 쇼 혹은 마네킹 퍼레이드를 개최했다. 초기의 패션쇼에는 가볍게 걸어 다니는 모델이 포함됐고, 디자이너의 초대를 받은 소규모 그룹의 VIP고객들은 앉은 자리에서 차와 카나페를 즐기며 쇼를 감상했다. 당시 대부분의 패션쇼는 고객들이 자신이 구입할 옷을 식별할 수 있도록 모델들이 착용한 옷에 번호를 매겨 모델들이 등장할 때마다 낭독했다.

그 가운데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폴 프와레(Paul Poiret), 영국 패션 디자이너 레이디 더프 고든, 루시(Lady Duff-Gordon, Lucile)는 패션쇼 참석자들의 욕망을 자극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프와레는 고객들에게 초대장을 발송해 쇼핑을 중요한 사교 모임으로 만들었다. 레이디 더프 고든은 커튼과 음악이 있는 연극 무대에서 영감받아 춤과 음악을 자신의 쇼에 융합시켰다. 최초의 글로벌 쿠튀르(유명 디자이너) 브랜드를 설립해 현대적인 PR 방식의 기초를 마련하며 전문적으로 모델 교육을 시도한 그는 자신의 디자인에 ‘안갯속의 사랑(Love in a Mist)’ ‘감정의 가운(Gowns of Emotion)’ 같은 낭만적인 이름을 붙여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의 패션쇼는 음악과 춤, 음식이 어우러진 사교 파티로 인터렉티브한 캣워크의 첫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194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획기적인 ‘뉴 룩’ 콜렉션을 선보인 제1회 파리 패션쇼가 개최될 무렵, 패션쇼는 디자인 살롱이나 호텔 등 작은 장소에서 열리는 진지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비숙련 모델은 전문 모델로 대체됐고 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워킹하며 특유의 포즈를 취했다. 1980년대가 되자 패션쇼는 매우 대중적인 행사가 됐다. 규모는 훨씬 커졌다. 1984년 파리의 제니스 경기장에서 티에리 뮈글러(Thierry Mugler)의 쇼가 열렸을 때는 6000명의 관객이 찾았을 정도로 인기였다. 신디 크로퍼드, 나오미 캠벨, 클라우디아 시퍼, 헬레나 크리스텐스 등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수퍼 모델들의 전성시대도 이때였다.


유행복 전시회 넘어 종합예술로

중국 만리장성까지 패션쇼 런웨이로 만드는 장엄한 무대와 로봇, 홀로그램 등 첨단기술이 접목된 2000년대 이후의 패션쇼는 신상품을 선보이는 ‘유행복 전시회’의 수준을 넘어선 종합예술이다. 10여 분의 제한된 시간에 진행되는 패션쇼는 인간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공감각적인 연출로 현대인의 소비 욕망을 부추긴다. 연극, 무용 등의 공연예술과 설치미술, 미디어 아트 등의 시각예술을 아우르는 이러한 패션쇼의 예술적 경향은 패션쇼가 대중에게 브랜드 이미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더욱 강화됐다.

대표적인 비주얼 아티스트로 2005년부터 파리 중심의 그랑팔레에서 패션쇼를 선보이고 있는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카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있다. 2017년 파리 패션 위크 동안 그는 그랑팔레에 프랑스 남부 베르동 계곡을 통째로 옮겨놓았다. 43m 높이의 거대한 유리 천장을 통해 햇빛이 쏟아졌고, 그 아래에는 폭포수가 흐르는 거대한 암벽과 연못이 조성됐다. 모델들은 무지갯빛 트위드 재킷을 입고 동굴 사이를 워킹했다. 예술가의 작품과 샤넬의 패션 낙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예술적인가? 한 편의 전위 연극 같은 연출로 패션쇼와 예술적 퍼포먼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과 YBA(Young British Artists·다이아몬드 해골로 유명한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해 1980년대 말 이후 나타난 영국의 젊은 미술가들) 작가들 중 누가 더 가치 있는 결과물을 남겼는가? 누구도 쉽게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패션이 사치스럽고 무용하다는 것은 위험한 편견이다. 오랜 세월 패션은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사람과 사람, 각기 다른 문화를 매개해왔다. 때로는 한 사회와 나라를 구하기도 했다. 4년 전부터 나와 한국 작가들이 매년 인도네시아를 찾아 연구하고 있는 ‘바틱(Batik·인도네시아 전통 수공예 직물 염색)’ 역시 그러한 경우다. 200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틱은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이자 현재 약 4800개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경제 산업이다. 바틱 관련 산업 종사자만 100만 명이나 된다. 뜨거운 밀랍을 잉크삼아 그린 바틱에는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이들의 철학 그리고 공동체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바틱이 인도네시아의 주력 산업으로 떠오른 데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1만3677개 섬으로 이뤄진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만큼이나 민족 구성도 복잡하다. 정부는 이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심어주고 일체감을 갖게 할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바틱 정책을 펼쳤다. 1970년대엔 바틱을 공무원 복장으로 제도화했고, 초·중·고 학생들의 교복으로 규정되기도 했다. 제6대 대통령인 유도요노는 매년 10월 2일을 바틱의 날을 제정하고, 제7대 대통령인 조코 위도도는 매주 금요일 전 국민이 바틱을 입도록 했다. 물론 이와 같은 천편일률적인 방식은 자유로운 패션의 정신과는 사뭇 다른 것이지만 인도네시아 사람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또 관광 상품이자 패션 상품으로 현지 사람들의 경제 활동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패션이 이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의 삶과 밀착된 우리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1년에 두 번이나 패션쇼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래서다. 왜 신은 이 땅에 사계절을 내려 우리를 갈라놓는가. 계절의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우리의 몸을 온도변화에 좀 더 무감하게 만들어주셨다면 좋았을 것을. 가을이 왔다. 패션위크의 계절이다. 다시 긴 옷을 꺼내 입을 때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