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탄둔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 모습. 사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탄둔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 모습. 사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결정한 이후 ‘세계 클래식 음악 시장의 수도’라는 런던의 이미지는 급격히 퇴색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사이먼 래틀과 로열 오페라 음악감독 안토니오 파파노도 클래식 음악 허브였던 런던의 위상 추락을 경고했다.

영국의 클래식 시장은 내년 3월로 예정된 브렉시트와 동시에 유럽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제외된다. 이에 따라 클래식과 관련한 인적·물적 교류 또한 1970년대 유럽경제공동체(EEC) 시절 이전으로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 런던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EU 회원국 출신 아티스트와 이들이 소속된 오케스트라, 매니지먼트사 모두 비상이 걸렸다.

EU 출신 음악도 입장에선 고물가에 까다로운 비자 발급 과정을 거치면서 영국에서 유학해 얻을 현실적 이득이 크게 줄었다. 영국 연주단체 입장에서는 비자 발급에 만만치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출연자를 섭외하고 EU와 제3세계 출신의 멤버를 꾸려나갈 역량과 자원이 부족하다.

런던에 본사를 둔 아스코나스홀트, 해리슨패럿, 인터무지카 등 클래식 음악 전문 메이저 기획사의 영향력 감소 또한 불가피해졌다. 브렉시트 결정 이후 이곳 소속 매니저들이 따로 에이전시를 설립해 기존의 아티스트를 데리고 영국을 탈출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영국 주재 악단들이다. 한정된 행정 인력으로 인해 공연 목적 비자 처리마저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영국과 외교 갈등을 빚고 있는 클래식 강국 러시아 국적 연주자의 비자 발급 과정은 브렉시트 결정 이후 더 길어졌다. 브렉시트 이전인 2015년에도 러시아 출신의 런던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의 보스턴 심포니 객원 지휘가 매니지먼트 팀의 비자 업무 착오로 취소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런던의 클래식 음악 시장은 하루 사이에 연주자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 빈번했을 만큼 낮은 개런티에도 대체 자원이 풍부했다. 하지만 브렉시트는 모든 상황을 뒤바꿨다. 유럽 주재 연주자는 1~2시간이면 비행기로 런던에 들어갈 수 있지만, 브렉시트로 비자 발급 절차가 까다로워지면서 급작스러운 대체 연주가 어렵게 됐다. 영국 오케스트라는 실질적으로 협연자 기용 풀이 좁아졌고 이는 연주의 질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게 됐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국적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런던 상주를 위해 취업허가(워크 퍼밋)를 받고 유지하기 위해 새롭게 부담해야 할 비용에 대해 영국 오케스트라는 아직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영국 예술위원회의 지원이나 EU 차원의 재정 보조가 불투명해지면 오케스트라의 탈(脫)런던 러시가 시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 통합을 명분으로 40년 넘게 런던에 본부를 둔 EU 유스오케스트라(EUYO)는 사무국을 이탈리아로 옮겼고, 최근 조성진과 앨범을 녹음한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본거지 이전 루머도 끊이지 않고 있다. 구성원 대다수가 EU 국가 출신인 유럽의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이중과세 방지를 위한 서류 작성과 비자 연장 같은 행정 비효율을 감수하고 런던에 머물 이유는 도시의 명성을 제외하면 거의 없어 보인다.

결과적으로 유럽 공연장과 프로모터의 초청 연주를 통해 재정을 확충했던 기존 수익 모델이 흔들리게 됐다. 런던 심포니를 제외하면 빈과 베를린이나 파리에서 연주력을 겨룰 영국 교향악단은 사실상 없다. 타개책으로 삼는 곳은 중국과 아시아 투어다.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벤치마킹

영국 오케스트라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중국 진출 전략을 모델 삼아 국면 전환을 꾀하고 있다. 재정 위기에 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저가 개런티를 감수하고 연이어 중국 투어를 강행했다. 그 결과 13억 인구의 중국 시장을 발판으로 명성을 회복하고 경영도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상당수의 영국 오케스트라는 아시아와 영연방 코먼웰스, 제3세계 등 해외 공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맨체스터 BBC 필하모닉과 버밍엄 심포니 정단원의 1년 기본급은 3만파운드(약 4500만원)에 불과하다. 해외 투어 등으로 추가 연주 수당을 벌어들이지 않으면 생계를 걱정해야 할 수준이다.

브렉시트 결정 이후 영국 오케스트라가 일제히 아시아 공연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런던 심포니는 10월 1일 사이먼 래틀과 롯데 콘서트홀을 찾고, 에사 페카 살로넨이 감독하는 필하모니아도 10월 18~19일 롯데콘서트홀에 온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이미 지난 3월 일본을 투어했고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도 5월 일본을 돌았다. 맨체스터 카메라타는 올가을 중국을 들르고 웨일스의 BBC 내셔널 오케스트라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베이징에서 공연한다.

런던 필하모닉은 2019년, 버밍엄 심포니는 2020년 중국 공연을 예약했다. 2016년 셰익스피어 기념사업으로 중국을 들른 할레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인연이 깊은 영국 남부 본머스 심포니도 중국 공연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런던 필은 2020년 호주와 인도 투어를 계약하면서 세계 곳곳에 런던 필을 대표하는 12명의 홍보대사를 임명했다. 런던 필의 향후 공연을 개최 도시와 연계해 홍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2013년 영국 주재 오케스트라가 공연한 국가는 35개국이었으나 2016년 42개국(그중 26개국이 유럽)으로 늘었다. 브렉시트 결정으로 줄어들 유럽 공연은 호주와 미국, 남아메리카와 미개척 시장인 동남아 공연 등으로 메꿔 나갈 계획이다.

런던 심포니는 홍콩 출신 여성 지휘자 엘림 참을 기수로 태국과 베트남 시장을 두드린다. 2017년 처음 베트남을 방문한 영국 악단으로 기록된 런던 심포니는 2018~2019시즌 베트남 투어를 위한 베트남 항공 제휴를 추진 중이다. 영연방에 속한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콘서트홀과 싱가포르 아트페스티벌 등 지역을 대표하는 공연장이나 문화행사를 매개로 한 협력도 추진 예정이다.

동아시아 시장의 공연 기획자와 관객의 주머니 사정에 브렉시트 이후 영국 오케스트라의 생존이 달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