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창신5길 전경. 좁은 계단으로 시작하는 창신동 계단 골목은 창신6가길로 이어진다. 계단 골목은 완만한 경사가 반복되며, 나무가 울창한 절벽 오른쪽으로 낙산시민아파트가 있다. 사진 서울시
서울 종로구 창신5길 전경. 좁은 계단으로 시작하는 창신동 계단 골목은 창신6가길로 이어진다. 계단 골목은 완만한 경사가 반복되며, 나무가 울창한 절벽 오른쪽으로 낙산시민아파트가 있다. 사진 서울시

패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창신동은 남다른 ‘상징성’을 갖고 있다. 창신동은 강북의 전형적인 다세대 다가구 밀집지역이지만, 보세의류 도·소매 복합상가가 밀집한 동대문 상권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198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의류 생산 공장 밀집지가 됐다. 2018년 현재 창신동은 서울 패션·디자인 산업의 중심지인 동대문 패션클러스터에서 의류 생산을 담당하는 한 축으로 성장했다.

창신동은 보세 옷을 만드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소규모 공장과 다세대 주택이 혼재해 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창신동’ 하면 떠올리는 모습은 좁은 골목길 사이로 얼기설기 이어지는 회색의 낡은 알루미늄 셔터와 회색 시멘트로 지은 1~2층 높이의 다세대 주택에 3.3㎡(1평) 남짓한 좁은 방이 반지하부터 빽빽하게 들어선 쪽방촌이다. 실제로 사진 속 현재 창신동 골목길의 철제 대문은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고, 광고 전단과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창신동은 돈의문과 함께 서울 강북 지역의 대표적인 서민·저소득층 주거지역이다. 2005년까지만 해도 돈의동과 창신동에는 약 1225개의 쪽방이 있었고, 지금도 그 숫자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 현재의 겉모습을 보면, 창신동은 아주 옛날부터 작고 낡은 집들이 몰려 있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우리의 역사를 1950년대 6·25 전쟁 이전으로 돌리면 상황은 180도로 달라진다.

창신동은 20세기 초반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장소적 특성과 역사성을 보여 준다. 1930년대까지 창신동은 당대 최상류 거부들이 밀집한 부촌이었다. 1930년대 이후 도시빈민과 거부들의 공간으로, 1950년대 이후 이북 피난민들의 거주지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패션 봉제공장 밀집지역으로 동네의 성격이 급변한다.

아래 기사는 지금의 창신동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창신동을 소개한다.

“동대문을 나서면 왼쪽 성 밑에 궁궐과 같이 우뚝 솟은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 있다. 이 집이 준공되던 당시에는 조선 안의 집으로 제일 굉장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골에서도 일부러 구경을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한참 동안 한가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집 주인인 (중략) 임종상 씨가 십여 년 전부터 자기의 손으로 설계를 하고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중략) 육천칠백 평을 매평에 삼 원씩 이만여 원에 사서 재작년 팔월에 짓기를 시작하여… (중략) 그런데 이백육십여 칸이나 되는 큰 집을 한 바퀴 돌려면 우렁이 속 같아서 혼자는 찾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1일)

요지는 창신동에 대지 6700평에 건평 260평 대저택이 지어졌는데, 집주인은 임종상이라는 당대 경성 납세 2위를 차지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임종상은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번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기사에서 창신동에 대해 ‘이같이 임종상(林宗相), 장택상(張澤相), 조병택(趙秉澤) 등 백만장자의 대궐 같은 집들이 즐비한 부자촌’이라 표현했다.

창랑 장택상은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그 부친은 당대 거부였다. 조병택은 한일은행의 설립자로, 삼성 이병철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10대 경제인으로 손꼽혔던 인물이다. 한일은행은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그 외에도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생가 역시 창신동에 있었는데, 백남준의 부친인 백낙승은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로 평가받는다. 조병택의 한옥 크기 역시 대단했다. 조병택은 2000여평의 대지에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임종상의 대저택은 아방궁이라 표현될 정도로 컸다. 당대 오락용 잡지라 할 수 있는 ‘별건곤’은 아래와 같이 임종상 저택을 표현했다.

“임 부잣집! 이크 말도 말아라. 서에는 윤대가리, 중앙에는 민 대감, 동에는 임 부자 이것은 서울 하고도 고명한 삼대가이다. 실로 아방궁 이상이니, 외견상으로는 감히 개구(開口)도 못하겠다(감히 구체적으로 나열도 못 할 정도다). 입만 딱 벌리고 ‘아구~ 굉장도 하구나’ 할 뿐이다.”(대경성 백주 암행기, ‘별건곤’ 제2호, 1926년 12월)


장택상 주택이 있었던 창신동 641번지에 남아있었던 대형 한옥 전경. 700여 평의 대지에 지어진 한옥이었으나, 최근 헐렸다. 사진 김경민
장택상 주택이 있었던 창신동 641번지에 남아있었던 대형 한옥 전경. 700여 평의 대지에 지어진 한옥이었으나, 최근 헐렸다. 사진 김경민

산업화로 공간의 성격 변해

왜 갑부들이 창신동에 거주하였는가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없다. 그러나 유추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양은 도성외곽지역을 성저십리라 해 개발에 제한을 두었다. 비록 19세기 국가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에, 개발이 금지된 성저십리에도 사람들이 살기는 했으나, 그래도 도성 안과 같이 촘촘히 개발된 지역은 아니었다. 따라서 거부들 입장에서 대형 한옥을 짓고 폼 나게 살고 싶다면, 개발할 토지가 있는 도성 가까운 4대문 밖 지역이 그들의 레이더에 걸렸을 것이다.

유럽의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산업도시화 시기에 런던의 부르주아들은 산업화로 인해 혼잡한 도시(중심도시)를 벗어나,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교외 지역에 대저택을 짓고 이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도심 외곽의 대저택이 밀집한 이들 지역은 그야말로 부르주아 유토피아였다.

한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양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었는데, 4대문 중 남대문 밖은 일본인의 터전이었으며 북문은 험해 사람이 거주할 조건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인에게 남은 선택은 서대문과 동대문 일대였을 것이다. 실제로 1910~30년대 사진을 보면 이 두 지역은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부촌이었다.

이렇듯 갑부들이 몰려 살던 동대문 밖 창신동은 1920년대 경성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새로운 성격의 공간으로 급변한다. 갑부와 토막민(도시빈민)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