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일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실업자’의 마지막 문장이 어떻게 보이는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내 부모님.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난 일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리라. “난 일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이 문장은 일을 해야만 견딜 수 있는 사람의 자조 정도로 읽힐 수도 있다. 워커홀릭(workaholic) 같은 단어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워커홀릭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워커홀릭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는 문장은 아니다. 사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러니까 주인공 알랭이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일에 중독됐기 때문이 아니다. 일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는 일에 종속된 사람이다. 일의 노예. 아마도 내 부모님이, 또한 내가 그러하듯이.

일을 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불쌍한 인간이라니, 서글프고 피곤한 이 엔딩은 첫 문장과 연결되며 한층 의미심장해진다. “나는 한 번도 난폭했던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그러니까 한 번도 난폭했던 적 없던 그가, 57세에 집안의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사회의 잉여로 가라앉게 된 까닭은 단 하나다. 그에게 일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퇴직 후 4년의 세월 동안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다 구한 일자리인 배송 업체에서마저 눈엣가시 같은 십장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사고를 일으키고 회사에서 잘린 그에게 남은 것은 폭력을 행사했다는 죄명과 함께 빠듯한 살림을 더 팽팽하게 조여오는 벌금이 전부다. 재취업마저 요원해진 그의 미래에 대고 희망 같은 걸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당장 엉덩이를 발로 차 주고 싶어질 것이다. “신은 나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 달리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그가 서류 면접 통과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하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치러야 하는 시험의 내용이 좀 얄궂다. 대량 해고를 아무 문제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임원을 면접하는 자리에서 인질극을 벌여 임원들의 위기 대처 능력과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가 할 일은 물론 인질극이다. “가장 힘든 건 그걸 집행하는 거야.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지! 노하우가 필요하고, 의지가 필요하지. 그 멍청한 인간들하고 협상도 해야 하고.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해! 확실한 사람 말이야. 병사들이 필요하지. 자본주의의 진정한 보병이! 아무나 골라서는 안 돼. 안 그렇소, 카이사르? 그리고 최고의 적임자를 뽑기 위해서는 인질만 한 게 없지.” 인질극을 수행하는 건 윤리적이지 못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격렬하게 반대하는 아내 때문에 조금 망설이긴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알랭은 합격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입사를 향한 그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안타깝게도 노력이 합격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엔딩을 말하는 코너니까 엔딩을 말하자면, 이 마지막 문장이 암시하는바, 그는 살아남았다. 그가 결국에는 일자리를 얻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일자리는 엄밀히 말해 일‘자리’가 아니라 일 자체다. 여기에 주어진 지면에서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소동이 벌어지고 나서 알랭은 조그만 협회에서 젊은 창업자들을 도와주는 ‘시니어 자문역’으로 일한다. 알랭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그들의 발전 상황을 분석해 주고 전략 수립에 있어서의 도움을 주는 일 따위를 한다.” 노인을 위한 자리는 없다. 자리 없는 일마저도 기꺼워하며 받아들일 때 그는 자신을 착취하는 지옥의 레이스에 올라탄 것이다. 이 레이스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지옥의 레이스란 달리는 과정에서 그를 힘들게 하는 조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레이스가 끝나는 시점에서 그를 기다리는 허무와 공허를 피하기 위해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허무와 공허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대가 없는 노동을 제공하며 만족을 얻는 그에게 누구도 당신 지금 행복하냐고 물을 수 없다. 실업자가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그것은 ‘완전한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극도의 절망’에 갇혀 있는 것이다. 끝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끝내고 싶은 사회가 어긋나게 교차하며 자본주의의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이 소설의 엔딩은 끝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병사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피에르 르메트르(Pierre Lemaitre)

유럽 추리소설 대상을 휩쓴 프랑스 추리 문학계의 기념비적인 장인으로 통한다. 195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과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55세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쓴 첫 소설 ‘능숙한 솜씨’로 신인상을 받았다. ‘형사 베르호벤 3부작’의 첫 작품이기도 한 이 작품은 ‘본격 문학 이상의 품격을 갖춘 보기 드문 장르 소설’ ‘프루스트, 도스토옙스키, 발자크의 문체를 느낄 수 있는 수작’ ‘추리, 스릴러 대가의 탄생’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발표한 ‘웨딩드레스’ ‘알렉스’ ‘실업자’로 2009년 미스터리 문학 애호가상, 몽티니 레 고르메유 불어권 추리소설 문학상, 2010 유럽 추리소설 대상 등을 받았다. 특히 전후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소외된 병사들이 세상을 향한 사기극을 벌이는 ‘오르부아르’는 공쿠르상을 받으며 추리 문학계와 본격 문학을 장악하는 이례적인 작가로 이름을 높였다. ‘실업자’는 저자의 아버지가 56세에 실업자가 되면서 겪은 고통스러운 가족사에서 탄생한 이야기로 알려졌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 이야기를 통해 안정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 알랭처럼 절박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