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여자들’로 남성 디폴트 세상을 폭로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여성 운동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Caroline Criado Perez).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로 남성 디폴트 세상을 폭로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여성 운동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Caroline Criado Perez).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팩트풀니스’의 한나 로슬링은 “가난 혐오 뉴스에 속지 말고, 데이터를 보라”고 권고했다. 장기 데이터에 근거한 큰 그림을 보면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다”고 근거 있는 낙관주의를 설파하며. 영국의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세상이 진실로 더 나아지려면, 지금부터 여성 데이터를 수집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오랫동안 의심 없이 유지되던 남성 표준 세상에 허를 찌르면서.

그가 쓴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젠더 이슈가 첨예한 이 시대에 딱 맞춰 도착한, 정밀한 팩트 보고서다. 핵심은 하나. 표준 인간이 누구인가? 표준 인간이 남성으로 설정되면, 그와 다른 신체와 정서를 가진 여성은 모든 시스템에서 소수자로 ‘투명화’된다. ‘성차별 사례에 관한 가장 광범위한 바이블’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책 서술의 무기는 고양된 감정이 아니라 바로 ‘데이터’다.

왜 여성은 사무실에서 추위에 더 많이 떠는지, 스마트폰을 더 자주 떨어뜨리는지, 화장실에서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병원에서 더 자주 오진받고, 약효 없는 약을 먹고, 자동차 사고에서 더 많이 다치는지…. 도시 계획, 경제, 정치, 재난 상황 등 16가지 영역에 걸쳐 여성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낸다.

“모든 정책 수립자, 정치인, 기업 관리자의 책꽂이에 꽂혀 있어야 할 책”이라고 한 ‘더 타임스’의 평가는 과찬이 아니다. 남성도 여성도 함께 잘 살기 위해 새로운 데이터 설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영국의 여성 운동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를 이메일로 전격 인터뷰했다.


‘젠더 데이터 공백’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썼나.
“젠더 데이터 공백은 여성 데이터의 부재를 뜻한다. 의학부터 직장, 도시 계획, 경제, 정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간 수집되었고 지금도 수집 중인 방대한 데이터는 대부분 남성의 것이다. 그 결과 지구상의 거의 모든 제도와 시스템, 환경이 남성 디폴트(기본값)로 설계됐다.”

젠더 데이터 공백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나.
“사소하게는 남성 기준(40세 70㎏ 남성의 기초 대사율)으로 맞춰진 사무실 냉방 온도 때문에 여성은 덜덜 떨고, 남성의 손 크기로 제작된 스마트폰이나 피아노 건반 때문에 불편을 겪는다. 여성 임상시험이 안 된 약 때문에 부작용과 위험에 노출된다. 여성은 세금이나 재난 상황에서도 더 많은 불이익과 위협을 당한다. 중요한 건 젠더 데이터 공백이 악의적이거나 고의적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처음부터 인간의 기준을 남성으로 정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해결된 사례가 있나.
“스웨덴 칼스코의 제설 작업이 그 예다. 2011년 스웨덴 칼스코의 공무원은 성평등 지침에 따라 모든 정책을 성인지적 관점에서 재평가했다. 조사 결과 제설 작업에도 성차별적 요소가 있었다. 데이터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보다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향이 높다. 자가용이 있는 가정도 남성이 거의 자동차를 사용한다. 시의원들은 보행자와 대중교통 이용자 우선으로 제설 순서를 바꿨다. 눈 속에서 유모차(또는 자전거)를 미는 것보다 운전하는 편이 더 쉽다고 판단해서다. 겨울 보행자 사고 비용이 도로 관리 비용의 두 배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훨씬 이득이었다. 그동안 칼스코가 여성의 희생, 남성의 혜택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데이터 공백을 인지한 뒤로 더 나은 정책을 설계했다.”

젠더 데이터 공백이 메워진다면 여성도 남성도 더 지혜롭고 합리적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살게 될 거라고 했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여성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여성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디즈니의 공주, 마블의 영웅 캐릭터도 여성의 주체적인 시각이 반영되고, ‘미투(Me too·나도 당했다)’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는 상황에서 당신의 지적은 매우 유의미하다. 무엇보다 엄청난 데이터를 기반으로, 데이터 공백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 설득력 있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깊게 파헤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있었나.
“의학 분야의 데이터 공백을 발견했을 때였다. 인류 절반의 생명이 달린 중대한 문제였다. 물론 그전에도 ‘남성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디폴트 인간’이라는 믿음은 깊고 넓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이 사회에 정치와 문화 전반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있고, 국내총생산(GDP) 산출을 비롯해 전 세계 경제 정책은 지금까지도 여성의 무급 노동 기여분을 배제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의학 분야에도 데이터 공백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다. 그 결과로 여성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충격이 컸다. 21세기에 여성의 심장마비 증상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여성의 심장마비는 남성의 증상과는 다르며 심장 질환은 여체와 남체에서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반드시 알려야 했다.”

여성에 관한 데이터가 제대로 수집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무엇인가.
“자동차 충돌 시험이다. 역사적으로 자동차 충돌 시험에 사용되는 인형은 평균 남성의 인체 계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뿐이었다. 지금까지도 177㎝, 76㎏의 인형이 자동차 충돌 시험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된다. 평균 여성을 대표하기에는 너무 크고 또 너무 무겁다. 결국, 자동차 안전성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여성은 운전할 때 남성보다 더 앞으로 다가앉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손이 운전대에, 발이 페달에 닿고 계기판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전면 충돌 시 위험이 더 커진다. 자동차가 여성보다 더 뒤쪽으로 앉는 충돌 시험 인형에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다. 안전벨트 시험도 유방이 있는 인형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좌석 등받이는 어떤가? 평균 여성의 신체보다 훨씬 무거운 중량을 흡수하도록 디자인된다. 충돌 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앞으로 내던져진다는 뜻이다. 똑같은 자동차 사고를 당할 때 여성이 중상을 입을 확률이 남성보다 47% 높고 사망할 확률은 17% 높다.”

자율주행차까지 만드는 21세기 최첨단 자동차 회사들이 안전에 관한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인지하지 못했을까.
“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답은 둘 중 하나다. 첫째는 자동차 제조 업체들이 여성을 싫어한다는 것. 그런데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둘째는 남성을 중립적인 성으로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평균 여성이 평균 남성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무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책 결정자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나.
“여성 진출 공백을 메우면 된다. 의사 결정 과정에, 연구에, 지식 생산에 참여한 여성들은 여성을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치 지도자의 젠더 감수성이 중요하다. 정치 영역에 더 많은 여성이 진출해야 한다. 요즘 시대에 기업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다는 점을 볼 때 민간 부문도 놓칠 수 없다.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는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구글에 다니고 있었다. 샌드버그는 자신이 아픈 발로 직접 걸어보고 나서야 건물 가까운 곳에 임부용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글은 샌드버그의 임신으로 뒤늦게 젠더 데이터 공백을 인지했다.”

한편으로는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안전하고 더 쾌적하며 더 호의적인 환경을 누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들 모른 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문을 제기해도 바뀌지 않을 거로 생각해서.
“깨닫는 계기가 필요한 것 같다. 나 또한 페미니즘에 입문하면서 그런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20대 초까지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러나 당시에 어떤 책을 읽고 내 머릿속이 남성 디폴트적 편견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의 성별을 모르면 당연히 남성이라고 생각하다니! 큰 충격이었다. 왜 한 번도 그게 이상하다고 의식하지 못했을까. 그 후로 남성 디폴트 구조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젠더에 민감한 환경에서 성장했나.
“가정환경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오빠가 있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외동딸이자 막내다. 다른 게 있다면 우리 가족은 브라질·스페인·포르투갈·대만·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살았다.”

아이들의 경우, 성장 과정 자체가 ‘남성 디폴트’의 영향권에 있지 않나.
“일단 여자아이가 교실에서 여성의 역사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 학교는 남성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가르친다. 가령 우리는 14~17세기를 르네상스로 분류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 시대에 여성은 여전히 지적·예술적 활동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공공장소를 예로 들어 보자. 여자아이는 10세 때부터 공원이나 운동장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남자아이들과 싸울 자신이 없어 남자아이들이 그곳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원 입구를 여러 개 만들고 스포츠 공간을 세분하자 그곳을 사용하는 여자아이가 점점 늘어났다.”

성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먼저 개선되어야 할 잠재적 불공평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가장 시급한 문제는 기술과 인공지능(AI)인 것 같다. 기계 학습이 편견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젠더 편견 문제를 속히 해결해야 한다.”

사실 여성 소비자가 점점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여성의 몸을 제대로 연구하고 데이터화한다면, 그것만으로 블루오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나. 더 작은 여성용 스마트폰을 만든다거나 등등. 기업이 여전히 소극적인 이유가 뭔가.
“다시 남성 디폴트적 편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남성 데이터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성 중립적인 데이터라는 생각에 너무 익숙하다 보니 의문을 제기할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무념의 편견’에 이의를 제기한다. 기업들이 하루빨리 깨닫기를 바란다. 젠더 데이터 수집이 올바른 일일 뿐 아니라 사업적으로도 똑똑한 일이라는 사실을!”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는 게 데이터의 속성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데이터를 향해 어떤 질문을 어떤 방식으로 던져야 할까.
“일단 첫 단계는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할 것인지’를 다양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결정하게 하는 거다. 집단 내 다양성이 부족하면 시작부터 틀리거나 불완전한 데이터가 수집될 수밖에 없다. 그다음 단계는 여성 데이터와 남성 데이터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중요한 통찰을 놓치게 된다. 마지막 단계는 당연해 보이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인데, 데이터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거다. 특히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데이터일수록 더더욱! 분명한 것은 더 좋은 데이터는 더 좋은 의사 결정을 하게 한다.”